#18. 지지 않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
클락에서의 꿈같은 4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단지 첫 해외여행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의 코 묻은 돈 따먹기를 하던 세 친구가 머나먼 땅 클락까지 와서 처음으로 게임다운 게임을 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원래 Beginner's luck이라는 말이 있듯이 처음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세 사람 모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작 200달러를 들고 클락에 온 진혁은 친구들한테 사준 술을 제하고도 원금 포함 1000달러가 넘는 돈을 가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영훈과 민섭도 각각 400달러와 350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세 명의 촌놈들은 믿을 수 없는 성과를 자축하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까지는 불과 2시간 남짓 남아있는 상태라 본격적인 게임은 어려웠고, 세 친구는 카지노에 잠깐 들러서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게임을 즐기기로 했다. 진혁은 그 상황에서도 친구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해서 절대로 쉽게 생각하지 말고, 며칠간 해왔던 것처럼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라고 잔소리를 했고, 영훈과 민섭은 지겹다는 듯이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진혁은 카지노에 들어섰지만 왠지 카지노를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벌어 놓은 돈을 지키겠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짧은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기에 조급하게 진행하다가 크게 낭패를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두 친구와는 떨어져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룰렛 쪽으로 가서 사람들이 게임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영훈과 민섭은 카지노에 입장하자마자 블랙잭 테이블로 달려갔다. 진혁이 룰렛 쪽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히려 잘 됐다는 듯한 싸인을 주고받았다. 시간도 부족한데 진혁이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다 보면 게임을 얼마 하지도 못하고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진혁이 룰렛 테이블로 이동해 보니 정말 너무 정신이 없었다. 하는 방법을 조금 익히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 게임하는 것을 구경했다. 룰렛에 모여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인들은 바카라도 사랑하지만, 룰렛에 대한 열정도 어마어마했다.
룰렛의 룰은 의외로 간단했다. 숫자에 베팅을 하면 각각의 배수를 받게 되는데 한 칸에 베팅하면 36배, 두 칸에 걸쳐서 베팅하면 18배, 네 칸에 걸쳐서 베팅하면 9배를 받는 식이다. 또 1st 12(1~12), 2nd 12(13~24), 3rd 12(25~36)에 베팅했을 때 해당하는 숫자가 나오면 3배의 배당을 받게 되고, 검정♦ or 빨강♦에 베팅하거나 홀수(ODD) or 짝수(EVEN), Low(1~18) or High(19~36)에 베팅할 경우 2배의 배당을 받는다.
진혁은 룰렛의 최대 변수는 바로 저 '0'이라고 판단했다. '0'이 나오면 메인 베팅은 물론 홀짝이나, 빨강검정, High&Low 등 사이드 베팅 모두 카지노에게 귀속된다. 카지노가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건 바로 저 '0'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약간의 조작이나 장난질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진혁은 스스로도 어이없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30분간 다른 사람들의 게임을 구경하며 판을 구경하던 진혁은 아주 소심하게 1달러씩을 베팅해 보았다. 최근 5판 동안 계속 높은 숫자들이 나와 낮은 숫자를 중심으로 공략해 보기로 했다. 이상하게 계속해서 높은 숫자들이 나왔고, 진혁은 여전히 낮은 숫자를 중심으로 베팅을 했다. 간혹 낮은 숫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진혁이 베팅한 숫자를 비켜나갔다. 36배를 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도 맞추지 못하니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룰렛은 한 게임이 돌아가는데 보통 3~4분 정도 소요되었다. 베팅을 하고, 룰렛이 돌아가고, 베팅 금액 정산을 하고 새로운 베팅이 시작되는 데까지 4분으로 잡으면 1시간에 15판, 2시간이면 30판이 되었다. 1달러씩 베팅을 해서 다 잃어도 30달러이기 때문에 재미 삼아 시간 때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고작 1달러지만 룰렛이 돌아가는 그 순간에는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그야말로 가성비 높은 게임이었다. 그러다 딱 1번만 숫자를 맞춘다고 하면 오히려 6달러를 벌어갈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인 셈이다.
진혁은 시간을 때우며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살짝 올라온 오기를 누르며 남은 시간 동안 숫자 '0'으로 고정해서 베팅하기로 생각했다. 확률적으로는 0부터 36까지 37개의 숫자가 동일한 확률인데 '0'일 경우 모든 돈을 카지노가 가져가는 것에 대한 소심한 저항 같은 개념이었다. 지난 20번의 게임에서 '0'이 나오지 않은 것이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대략 약 15번의 게임에서 여전히 '0'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15달러를 카지노에 헌납한 것이다. 공항으로 출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30분. 많아야 10번 정도 더 베팅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0'이 나오지 않은 게임수가 30판 정도로 늘어났다. 진혁은 10번의 게임 동안 3달러씩 베팅을 올리기로 했다. 전부 못 맞춘다 해도 30달러의 손해뿐이기에 크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됐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덜커덕"
"zero, congratulations!"
진혁이 3달러로 베팅을 올린 지 2번째 되는 판에서 공이 '0'으로 쏙 하고 들어갔다. 총 32번 만에 '0'이 나온 것이다. 진혁을 제외한 다른 중국인들은 아무도 '0'에 베팅하지 않았기에 상당히 많은 칩들이 딜러에게 넘어갔고, 진혁은 베팅금액 3달러와 36배의 배당금 108달러까지 111달러를 돌려받았다. 앞서 맞추지 못해 카지노에 헌납한 금액을 제하고도 무려 90달러의 추가 수익을 얻게 되었다.
배당금을 정산받은 진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룰렛 테이블을 떠났다. 이제 곧 떠날 시간이 되기도 했고, 영훈과 민섭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해서였다. 블랙잭 테이블로 돌아오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 씨발! 개 좆같은 새끼들! 거기서 어떻게 21이 나오냐고!"
"Sir, Don't curse at me! (손님 욕하지 마세요!)"
"지금 욕 안 하게 생겼냐고! 16에서 어떻게 5가 뒤집어지냐고! 한두 번도 아니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