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아마란스(Amaranth) 같은 취향을 갖고 있을까.
사실 이 순간을 쓰기 위해 어쩌면 내가 이 매거진을 만든 장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친구와 종로구의 일민미술관과 에무 시네마에 갔다가 계획에도 없는 끼니를 채우기 위해 예상에도 없는 연희 김밥을 먹고 나서 축축 처지는 날씨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고자 LP 바 두 군데를 찾았다. 하지만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많은 곳이 영업을 하지 않았다. '어딜 갈까. 우리 전날에는 술도 많이 먹었고 내일은 출근해야 되니 적당히 마실 수 있는 곳 아무 곳이나 들어갈까? 여기가 좋겠다.' 하며 이름도 모르는 골목길에 위치한 술집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생각한 외관상의 모습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이 정겹고 조용했다. 친구와 함께 가벼운 메뉴와 주류 한 잔씩 시키고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식탁을 세팅해 주시는 사장님께 나는 가게의 이름을 여쭤보았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곳이었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사장님께서는 '아마란스'라고 하셨는데 나는 '아마란스가 뭐예요 사장님?'이라고 여쭤보니 꽃이라고 하셨다. '술집 마당 앞에 심어진 저 꽃도 아마란스, 벽면에 걸린 꽃그림들도 내가 그린 거예요. 이 메뉴판에 그려진 꽃도 아마란스인데 저희 딸이 이렇게 내 그림으로 메뉴판을 만들어준 거예요. 내가 아마란스를 너무 좋아해서요.'라며. 왜 하필 아마란스일까. 궁금해진 나는 아마란스가 어떤 꽃인지 몰라 휴대폰으로 아마란스를 검색해 보니 이제야 이 꽃이 어떤 꽃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아. 이 꽃이구나. 근데 이 꽃을 왜 좋아하세요?'라고 여쭤보니 사장님께서는 서양화를 전공하셨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늘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찾고 좇아야 하는데 어느 날 공원을 걷다가 붉은 아마란스 포기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그때서부터 아마란스만을 그리셨다고 한다. 풀 하나보다 붉은 풀포기가 모여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에 감명을 받으셨다고 한다. 나는 사장님의 눈을 보고 얘기를 듣는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 감정은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어떤 한 존재가 좋아하는 대상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눈에서 사랑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반했다. 그 순간 나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취향을 계속해서 찾아야겠다고 깨달았다. 외부에 비해 공간의 내부는 투박하고 정겹다고만 느껴졌지만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공간의 가치가 나에게 갑자기 높아졌다. 나에겐 아마란스 같은 뚜렷한 취향을 갖고 있을까.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문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첫 매거진의 이름을 '우연의 희로애락'이라고 지은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늘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들에 예외가 생긴다. 그 순간에 나의 생각이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좋아.'라는 기쁜 기억이 될 수도 있으며 값진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양날의 검처럼 기존의 계획보다 더 안 좋은 쪽으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나는 절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어서 (지금도 완벽주의를 버리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다.) 내 계획에 없는 순간들이 생기면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는데 언젠가부터 즉흥에서 느끼는 순간들로부터 더 재밌고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이 있음을 느꼈다. (비교적 나보다 더 즉흥적인 성향을 가진 내 친한 친구들 덕분에 얻게 된 고맙고 닮고 싶은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틀에 박혀 있고 다소 고지식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즉흥에 기쁨을 느끼는 새로운 습관이 반가웠다.) 우연히 만난 기쁨도 있다면 반대로 당연히 슬픔도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락의 감정으로 빠질 때도 있고 분노를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 우연의 일들이 모여 하나의 내 커다란 삶을 이루는 게 참 값진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연찮게 들어간 술집에서 누군가로 인해 아마란스의 존재를 알게 되며 취향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 더 확고해지게 된 계기가 생긴 것처럼 말이다.
기존에 쓰던 글은 한 취향의 한 주제만을 갖고 풀어썼다면 이 매거진에선 나의 일상을 좀 더 자세하게 쪼개서 사소한 순간들 마저도 나중엔 나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이 매거진을 만들었다. 글을 좀 더 많이 쓰려고 한다. 누군가의 글을 더 많이 읽고 다양한 형태의 글을 눈에 담으며 그 기반으로 더 많이 쓰려고 한다. 자아 성찰이라는 주관적인 글을 쓸 수도 있고 나의 분야에 관련된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글이 될 수도 있다. 늘 생각해오던 가치관 중에 하나가 있다. 모를 거면 아예 모르는 게 낫지만 어설프고 얕게 아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된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어설픈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글을 쓰며 반성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더 글을 써야겠노라고 다짐한다.
에무 시네마에서 봤던 <c'mon c'mon(컴온 컴온, 2021)
"계획했던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펼쳐질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해요.
come on. come on. 해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