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그림을 잘 그리려는 욕심은 없어.
얼마 전, 사람의 인연이 닿고 닿아 아트웍 수업을 하는 클래스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입문의 계기는 간단했다. 오로지 대학 입학을 위한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입시미술을 4년씩이나 했는데 그 틀을 깨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틀을 깨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분명히 본연의 끼가 있음에도 분출하지 못하고 고여버린 내 모습이 그저 안타깝다고만 생각해오면서 몇 년이 흘렀는데 이젠 그 감정마저도 희미해져 버린 채 살아왔다. 그러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인연을 통해 아트클래스에 입문하게 되었고 전화 상담을 받고 며칠 뒤 바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나와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과 굽이굽이 좁은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그곳에서 땀을 식힐 겸 30분을 쉬게 해 주셨다. 수업이라는 말뿐 내 예상을 확 깨버리는 형태의 클래스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공간의 배치나 소수의 수강생 분들을 볼 수 있었다. 흔히들 학원에 가면 백색등 아래 벽이나 유리로 분리된 공간 속에서 원장님 혹은 선생님과 내가 둘이 마주 앉아 학원에 대한 설명이나 커리큘럼, 그림 스타일 등 오로지 학원에 관련돼서 얘기를 보통 나누는 편이라 그날에도 역시 그런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내 사고방식의 틀을 깬 첫 번째는 절대 부담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희는 바로 수업 시작하진 않을 거예요. 마실 건 어떤 걸로 드릴까요?’라며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음료 종류들을 읊조리셨고 (심지어 주류까지) 바(bar) 같은 자리에 앉아 이내 정성스레 내어주신 아이스 페퍼민트를 마시며 온갖 상상에 부풀어 올랐다.
30분이 지나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전화 상담할 때도 난 되려 선생님께 걱정되는 말로 ‘제가 4년 그리긴 했지만 손 뗀 지 몇 년이 돼서요. 정말 기본 수업과 병행하지 않아도 될까요?’라고 여쭤보니 정말 자신 있게 또 완고하게 ‘그리시다 보면 손에 다시 익으실 거예요.’라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내가 자유 개체를 그리는데 그림을 그릴 때 갖고 있는 습관이 불쑥불쑥 나와서 흠칫하면서도 신기했다. 선생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여주셨다. 내가 입문하게 된 아트 클래스는 한국의 입시미술학원과 유학을 가기 위한 포트폴리오 학원 그 사이의 포지션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다 보니 스케치도 없이 추상적인 개체 2개를 뚝딱 그리셨는데 눈으로 처음 보는 스타일이었기에 덜컥 걱정이 앞서면서도 흥미로웠다. 입시미술 스타일인 깔끔하게 다듬지 않으면서도 또 그렇다고 무조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포트폴리오 학원도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부담 없이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다. 네 가지 컬러의 물감을 직접 골라보라고 하셔서 내가 고른 물감들로 시범을 보여주신 뒤 나도 자유 드로잉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드로잉을 하면서 계속 생각했던 건 ‘내가 더 잘 그려야겠다’라는 생각이 아니었다. 10년 전 나는 경쟁에서 다른 친구들을 이겨야만 했고 그들보다 잘 그려서 대학을 잘 가는 게 어린 소녀의 목표였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였고 재수가 확정되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물론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이 된 지금의 내가 되었기에 그 사이 나의 가치관이나 목표도 자연스레 바뀐 것도 맞겠지만 확실한 건 그림에 있어서 타인과의 경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굳이 경쟁이라고 따진다면 이젠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림을 그릴 땐 과거의 구태의연한 입시 미술 스타일을 어디까지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그려야 하는지, 또 자유롭게 그리되 너무 놔버리면 중구난방에 그림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무너질까 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붓터치나 선을 쓸 때마다 타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서 시범을 마치시고 나보고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자리를 내어주셨을 땐 정말 놀랍게도 흰 도화지를 바라보니 ‘내가 정말 마음 가는 대로 그려도 되는 걸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스케치도 안 한 스케치북 위에 허공에서 괜히 붓을 휘두르다 그마저도 멈추고 나중엔 그냥 1,2분 정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이 세상에 하얀 도화지와 나만 하늘에서 바닥으로 쿵 떨어진 기분이었다. 선뜻 붓을 쓰기 무서웠지만 이내 이겨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잘 그려야겠다.’가 아닌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릴 때 기본만 지키며 기준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를 생각보다 더 놔야겠다는 걸 깨달았다. 총 세 개체를 그렸는데 그중 두 개체는 내 예상보다 너무 칭찬을 많이 해주셨고 (정형화되어 있는 스타일에 머물러 있다 보니 ‘이렇게 추상적으로 막 그려도 괜찮아? 너무 그림이 뭉개진 건 아니고?’라는 걱정에 그리면서도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 칭찬을 들은 게 의외였기 때문이다.) 지금 좋으니까 이 감을 잃지 말고 더 큰 캔버스에서도 잘 풀어내 보라고 하셨다. (여담으로 오히려 너무 추상적인 개체를 그렸으니 이번엔 정형화된 개체를 그려보자고 생각해서 그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슬슬 입시미술의 습관이 나오고 있네요. 이건 여기서 스탑 하시죠.’라는 말씀을 들었다.)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가 나의 수강 시간이었는데 중간에 선생님께서 시키신 피자를 먹으며 잠깐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나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선생님과 10시 좀 넘어서까지 간단한 스파클링 와인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아트 클래스의 하반기 계획과 그림에 대한 나의 걱정과 생각들 및 선생님 이야기 등등이었는데 듣다 보니 정말 멋있는 공간과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모습이 기대됐다. 그리고 앞으로는 많아도 5,6명만 수강생분들을 받으면 클래스가 꽉 찰 거라고 했는데 좋은 시기에 잘 들어오셨다며 저희 크루에 들어오셔서 너무 기쁘다고 말씀하셨고 ‘크루’라는 단어에 굉장한 소속감을 느끼게 됐다. 내가 이 멋진 그룹에서 나 역시 굉장히 높은 수준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을 떨칠 겸 다음 수업을 위해 자유로운 드로잉 연습을 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려야겠다.
얼마 전, 길에서 같이 입시 미술을 했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는 ‘너만큼은 패션 디자인에 진심인 친구가 없었는데. 지금은 MD를 한다는 게 너무 신기해.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거에 대해 아깝거나 그런 건 없어?’라고 물어봤었는데 당시엔 이미 거의 휘발된 감정이었어서 ‘딱히?’라고 답했다. 그런데 아트 클래스에 입문하고 나니 또 욕심이 생겼다. 내가 그림 그렸던 사람이란 걸 잊고 살았는데 다시 나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내가 그리면 그릴 수록 또 ‘더 잘 그리고 싶다. 진짜 내 스타일을 찾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경쟁과 더불어 성장을 위한 격려의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다.
이 날은 도화지가 반갑기보단 무서웠다. 나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몇 개가 있다. 높은 곳, 벌레, 폐쇄 공간 등이 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며 느낀 건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또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건 ‘틀을 깨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이다. 꾸준히 노력하며 시간이 지나서는 하얀 도화지가 나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내가 맘껏 헤엄치고 싶은 바다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더 큰 캔버스에서 자유롭게 헤엄쳐도 겁나지 않게끔 말이다.
조만간 스케치북을 다시 사야겠다. 뭐라도 끼적이고 습작을 계속해서 만들어야겠다. 수련의 개념으로 말이다. 수업은 한 달에 두 번 듣는데 얼른 다시 방문해서 선생님께서 계속 틀어놓으신 쳇 베이커 노래를 함께 들으며 두려움을 조금 더 떨쳐낸 내 모습으로 그림을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