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향한 내 마음은 이젠 자연스럽기에.
* 이 글은 작가 신청할 때 심사받은 글로써 당시 글에 기재된 날짜는 일부러 고치지 않고 문맥만 조금 수정하고 발행했습니다.
7월의 끝자락으로 갈수록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제일 덥다는 8월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더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얼굴에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을 쐬는 것만 같은 날들의 연속이다.
열대야로 밤잠을 자못 설치는 건 나만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예민함을 달고 사는 사람인 데다 심지어 한여름의 사춘기처럼 나는 매 여름마다 병명미상(이라 쓰고 미래에 대한 불안증이라고 읽는다.)으로 느지막이 얕은 잠에 들거나 꼴딱 밤을 새기도 한다. 중학생 땐 중2병, 사춘기는 중2병과 겹쳐 고1까지, 대학생 땐 대 2병으로 연애, 진로, 인간관계 등 깨나 마음고생을 했다. 괴로운 순간들이었다. 대학생 땐 무조건 패션 디자이너를 할 거라는 진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전공까지 택했는데 생각보다 나의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이리저리 방황을 많이 했다. 졸업을 하고 2년이 지난 지금, 취준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수도 아닌 사회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더 나은 진로를 위해 고민하며 유일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글이라고 여겨 생활 속 글감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촉을 세우고 있다.
여전히 미래에 대해 방황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갈구하고 있으니 내 머릿속 복잡한 것들을 정리해주는 게 필요했다. 그래도 신은 한 가지 이상은 공평하게 저마다 능력을 주셨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나한텐 글이었다. 천부적으로 글을 잘 쓴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다. 글을 쓰는 행위란 겉으로 봤을 땐 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더 좋은 글을 잘 쓰기 위한 끊임없는 고민과 열정이 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내 성향상 잘 맞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느리지만 꾸준히 행할 수 있는 표현 수단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최근에는 과거 29cm의 헤드 카피라이터이셨던 이유미 님께서 쓰신 <문장 수집 생활>이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다. 사실 단순히 글만 잘 쓰고 싶다는 목적만 있었으면 아마 다른 분들이 쓰신 책을 빌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내 성향에 맞는 진로를 더 확고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알게 됐고 그 세계가 궁금했어서 가볍게 읽게 됐다.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에 읽게 됐지만 나중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교훈 중에 기억 남는 글은 ‘좋아하는 것에서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거였다. 맞아, 내가 좋아하는 건 하얀 백지 위에 놓인 활자들이었지, 하며 며칠 뒤 그 책에서 문장 수집이라는 나에게 무척 신선하고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며 연신 강조하신 ‘필사’라는 행위에 마음이 계속 기울었다.
전공과 성향상 패션에 대한 관심이 엄청 크기에 이것저것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욕심이 항상 있어 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맘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며 수집한다는 표현을 봤을 땐 소유라는 건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이상형인 남자분을 보고 한눈에 반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그 표현을 보자마자 순간 전율이 느껴졌다. 문장을 수집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좋아하는 장르의 책을 많이 읽고, 팟캐스트나 라디오 속 DJ의 말들, 주변 사람들의 오고 가는 말들에 촉을 세우고 그저 메모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동네 도서관이 마감하기 1시간 전에 급하게 빌려서 근처 동네 카페에서 그 책을 읽었는데 습관처럼 반복해서 나왔던 ‘필사’라는 행위와 단어에 꽂혀버려서 쉬운 호흡의 글이었는데도 다 읽지 않고 집 가는 길에 깔끔한 노트를 구입했다. 본격적으로 필사를 하기 위함이었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수집하겠다는 나의 결연한 결심에서 나온 파생의 행동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집에 갖고 있는 책들 중 재밌게 읽었다고 생각한 책들을 책장에서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고 날이 더우니 오고 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고자 도서관에서 한꺼번에 몇 권씩 책을 빌려왔다. 그동안은 책이 안 읽혀서 완독 하지 못했을 때의 어떠한 자책이 있었는데 이유미 님의 <문장 수집 생활>을 읽고 나니 완독에 대한 부담감이 좀 줄어들었다. 그리고 책이 안 읽히면 다른 책으로 과감하게 넘어가도 된다고 했고 출근길에는 호흡이 짧은 에세이, 퇴근을 하고 난 뒤에는 호흡이 긴 소설을 읽는다고 했던 부분에서 책을 한번 펼쳤으면 다 읽어야 하는 마음의 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기존에 갖고 있는 완벽에 대한 강박이 깨지는 시점이었다. 물론 그분 말이 완전히 정답은 아니지만 충분히 내 일상 속 균형에 맞게 tv 채널을 돌리듯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글을 더 많이 읽고 싶어 졌고 필사가 재밌어졌다. 늦게까지 일을 하는 날에는 필사를 못했지만 그것도 며칠뿐이었다. 한 줄이라도 필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시간이 안될 땐 단 10분이라도 필사를 했다. 필사란 손으로 하는 수행이라고 하는 걸 어디서 봤는데 인내심을 갖고 필사하는 행위가 정말 수행과 닮았다. 욕심이 나서 더 많이 옮겨 적은 날에는 팔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정말 정성을 담아, 내가 그 당시에 왜 이 문장에 공감해서 괄호를 쳤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곱씹으며 백지에 천천히 옮겨 적었다. 나의 진심을 옮겨 담아 노트에 담기게 되는 것이니 필사라는 행위에 애정이 점점 더 커져갔다. 이러다 보니 내 행복을 더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동네 골목에 위치해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인 카페에 가서 필사를 한다. 평소에 갖고 싶었던 물질적인 것을 소유했을 때처럼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에 괄호를 칠 땐 소양이 높아지는 느낌과 동시에 내가 하나를 더 얻었다는 마음에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느낀다.
그러니 이제 독서와 필사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나는 일이 없으면 무조건 애저녁에 부랴부랴 책과 연필을 챙겨 좋아하는 카페로 향한다. 내 행복이 극대화되고 취향은 더 확고해진다. 필사를 하기 위해 일을 쉬는 오늘 저녁에도 필사적으로 카페로 향했다. 문장을 수집하고 새로운 표현을 배우며 추후에 내가 쓸 글에도 감칠맛 나는 묘사를 담고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