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 Story
새로운 일정이 생겼다. 울산에 있는 한 병원의 신관이 새로 오픈한다는 얘기를 들었고 해당 프로젝트의 기술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급하게 SRT를 예약했다. 입사 초반엔 외근 일정이 갑자기 잡혀서 당황한 적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적응이 됐다. 출발 당일이 되었고 아침 일찍 수서역으로 이동했다. 근처에서 아침밥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출발하기 15분 전에 SRT에 탑승했다. SRT 예약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예약이 잘 돼서 어렵지 않게 울산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2시간 10~20분 정도 지났을까? 자고 있느라 정신없던 눈꺼풀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울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내 기억으로 이 날이 주말이었다. 토요일도 아니고 일요일이었는데 전날에도 서울 근처에 위치한 의료재단의 작업 요청이 있어서 쉬지도 못하고 작업을 했다. 토요일 작업도 일찍 끝나지는 않아서 거의 6시가 다 돼서야 철수했는데 이때부터 몸 상태가 좀 좋지 않아 일요일 출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다소 호전된 것 같아 무사히 출근을 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쯤 되어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막 오픈하는 병원이어서 그런지 주변 환경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의 메인 작업장인 검사실로 향했는데 검사실 역시 아직 PC나 장비가 제대로 세팅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일단 상황 파악을 어느 정도 진행한 이후에 본격적인 개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엔 이미 선배 개발자가 먼저 작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선배와 만나서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간단한 차 한 잔을 하며 그동안 하지 못한 대화를 했다. 사실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개발을 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무리 경력이 있고 오랫동안 개발을 해왔다고 하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칠 수밖에 없다. 전국에 거래처가 있는 만큼 업무량도 많아지고 병원이 24시간이다 보니 새벽이나 자고 있을 때 전화가 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게 인터페이스 개발자의 숙명이었다. 고객이 요청을 하면 당연히 거기에 맞는 대응책을 제시해줘야 하고 문제해결을 하는 게 개발자의 의무이니 말이다. 선배는 시간이 갈수록 담당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너무나 많은 곳에서 연락이 오느라 일일이 대처하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 늘어나는 담당 사이트로 인해 날마다 걸려오는 연락 때문에 중간에 작업을 하다가도 순간 집중력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고 본인들이 망가뜨리고 나서 개발이 잘못된 거 아니냐고 따지는 경우도 있었다. 평온한 멘탈 관리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멘탈이 붕괴되는 날들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또 버텼다. 물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혔지만 실로 대가는 엄청났다. 선배와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의 일정이 끝나고 다음날이 되었다. 프로젝트 일정에 맞춰 작업이 진행되었고 현장 상황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된 상황이어서 본격적으로 인터페이스 개발에 착수했다. 사전에 미리 개발을 해오긴 했지만 해당 사이트의 전산 정보와 현장에 있는 검사장비의 스펙을 직접 확인해야 했기에 현장에서 어느 정도 수정을 거쳐가며 개발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개발을 해오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와 납품도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이슈들이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개발을 하고 있는 와중에 부장님이 병원에 방문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1층으로 내려가 부장님을 맞이했다. 부장님은 우리 팀에서 에이스 중에 에이스였다.일처리도 깔끔하셨고 늘 차분함을 유지하시는 분이었다. 내 자신을 볼 때마다 언제쯤이면 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입사 초기에 부장님과 같이 외근을 나간 적이 있었다. 부장님도 처음에 많이 고생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프로젝트 진행 당시에 담당자 분들에게 욕먹어가면서 일했다고 얘기하시는데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시간이 약이라는 생각으로 잘하면 되겠지 하고 넘어갔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쉽지 않았다.
부장님의 합류로 인해 개발 작업의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좀 쉬다가 오후 작업을 이어나갔다. 오후에는 인터페이스 연동을 위해 가져온 케이블, 랜선, 드라이버들을 활용하여 통신 테스트를 진행했다. 여러 가지 통신 방식이 있지만 장비마다 통신 방식이 다르고 개발적인 요소도 고려해야 하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그동안의 역량과 노하우가 쌓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담당자의 요청이 있었는데 케이블 선이 바닥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바닥 하부로 장비와 인터페이스 PC를 연결하는 케이블을 밀어넣고 케이블 타이를 활용하여 충분히 고정시켜 주었다. 가끔 선정리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랬다. 어쨌든 잘 마무리하고 통신이 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를 했다. 다행히 통신을 잘 되어서 데이터 전송에 큰 문제는 없었다. 어느 정도 작업을 마친 이후 숙소로 복귀했다.
숙소에 복귀하여 짐을 푼 다음 부장님과 선배 개발자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으로 국밥을 먹었는데 약간의 술과 곁들여서 먹으니 꿀맛이었다. 오랜만에 3명이서 만나 저녁식사를 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한때 신입이었던 내가 이제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서 출장도 다니며 프로젝트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쌓였다는 게 신기했다. 당시 TV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기사를 봤다. 전쟁 걱정없이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밥을 다 먹고 숙소로 돌아가 내 방에서 간단하게 2차를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과 과자 몇 개를 구매했다. 밤늦은 시각의 짧고 짧은 2차였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그동안 출장 다니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개발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들을 얘기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업무 특성상 함께 모여 점심, 저녁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일정이 저마다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따로 일정을 잡지 않는 이상 같이 모여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근데 3명이 모여서 같이 밥을 먹고 술자리를 가졌으니 뜻밖의 행운(?)이었다. 그렇게 1~2시간 정도 술을 마시며 재밌게 대화를 나누다가 다음날 일정을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자려고 하던 찰나 다른 병원에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새벽 작업을 마치고 겨우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숙소 로비에서 부장님과 선배를 만나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작업은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 했으나 뜻하지 않은 변수들이 생기면서 생각보다 작업 속도가 더디게 흘러갔다. 개발도 다 잘 되었고 세팅도 다 해놓은 상황이었지만 실제 검사를 진행하기 위한 검체 확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테스트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최대한 실제 검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는 조치를 해놓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이트의 일정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선배 개발자는 울산에 머물기로 했다. 나와 부장님은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 근처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는데 시간 관계상 밥을 먹기는 뭐해서 카페로 갔다. 저녁은 카페에서 판매하는 커피와 빵으로 해결했다. 정처없이 일하다가 잠깐 쉬는 타임에 배가 고파서 그런지 꿀맛이었다. 입사 이후 정말 오랜만에 부장님과 밥을 먹고 이동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얘기들을 많이 했다. 첫 입사 당시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의 바뀐 점, 울산 프로젝트 관련 내용, 앞으로의 일정 등등 주로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그 외 다른 대화들도 많이 하며 심심한 대기 시간을 잘 채워나갔다. 비행기 탑승 시간 30분 전, 탑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시간 정도 지나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9호선 급행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열차가 바로 도착해서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었다.
나는 잠실까지 가야 했는데 부장님도 목적지가 같아서 같이 이동했고 1시간 조금 지나 잠실에 도착했다. 잠실에서 부장님과 헤어진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언제 갔다왔는지 모를 만큼 시간이 훅하고 지나가버린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밤늦게 도착하고 나면 사실 개인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씻고 자는 거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음 날의 일정을 위해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하니 말이다. 지방 출장을 갔다 오면 이런 날들이 종종 있었다. 일정은 5시나 6시에 끝나지만 이동하는 시간 때문에 집에 도착하면 10시, 11시는 기본이었다. 평일날 자기계발이나 문화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불현듯 걸려오는 전화도 대비하며 하루를 보내야 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흘러갔고 다음 일정을 소화했다. 하루가 흐르고 또 하루가 흘렀다. 시간이 지나 좀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밀려드는 업무량과 일정 때문에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번아웃인지 몰랐다.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출장을 가고, 출장을 가고, 또 출장을 갔다. 하지만 매일같이 출장만 가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본사에 머물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유지보수와 개발을 하기도 했다. 본사로 출근을 하여 작업을 하던 날, 우연히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이 전화 한 통으로 인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개발의 참맛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데...
>> 13화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