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효능감이 방전되었을 때
오후 3시, 회사 모니터 앞에 불청객 하나가 찾아온다. 어제도 본 것 같은 그 모습에, 엑셀 칸을 채우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화면 속 커서는 나를 재촉하는 듯 깜빡이는데, 내 머릿속에는 뜬금없이 거대한 물음표가 뜬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실수를 한 것도, 상사에게 깨진 적도, 동료와 싸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게 가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일명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이 바닥 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를, 그리고 이 일자리를 아낀다. 하지만 도무지 내가 '유능하다' 또는 '유능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기계의 녹슨 부품이 된 것 같은 무력감이 드는 듯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자기 효능(Self-Efficacy)의 추락'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이 들면 자책을 한다. 그리고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이런 말을 듣기 십상이다. "배가 불렀네", "남들도 다 참고 하는데, 왜 너만 유난이냐?" 그러나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건 인내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우리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성취를 느낄 때, '도파민'이라는 보상 호르몬을 내뿜는다. 하지만 매일 똑같은 업무, 즉각적인 피드백이 없는 지루한 과정을 반복하면, 뇌는 "어라라? 새로운 보상이 없잖아?"라고 판단하고 도파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꽉 잠가버린다. 이를 '보상 예측 오류(Reward Prediction Error)'라고 한다.
그러니 최근 느끼는 그 무기력함과 지루함은, 어쩌면 부족한 탓이 아니라 당신의 뇌가 "나 자극 좀 해줘, 성장하고 싶거든?" 하고 투정을 부리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사표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상황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상황을 정의하는 이름표'를 바꿔 붙이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 용어로는, '잡 크래프팅(Job Crafting)'이라고 한다.
나는 '현타'가 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금 이 지루한(혼란스러운) 순간마저도, 미래의 나에게는 어떠한 재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단순한 엑셀 정리를 하고 있다면 '데이터를 구조화하는 논리력을 키우는 훈련'이라고 이름을 바꿔 보고, 진상 고객의 컴플레인을 듣고 있다면 '훗날 내가 쓸 대처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라고 정의를 해보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무의미의 의미』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의미를 찾는 인간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지금 하는 일이 남이 시킨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내가 선택한 훈련으로 의미가 바뀌는 순간, 우리의 뇌는 다시금 의미를 찾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럼에도, 의미 부여조차 안 될 만큼 지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유치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작은 승리(Small Wins)'를 뇌에게 맛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효능감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효능감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은 성취 경험이라고 말했다. 굳이 거창한 프로젝트 성공일 필요 없이, 이메일 3통 보내기, 바탕화면 아이콘 정리하기, 책상 물티슈로 닦기 정도여도 된다. 그런 의미로 나는, 포스트잇에 아주 사소한 할 일을 적고, 그것을 해치운 뒤 빨간 줄을 긋는다. 그럼 그 순간, 나의 뇌는 "오, 뭔가 해냈군!" 하며 도파민을 찔끔 흘려준다. 그 작은 성취감은 때때로 방전되어 버린 나의 배터리를 다시 충전하는 마중물이 된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 뛰기만 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역시 나의 체력과 근육, 심폐지구력을 키워주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높이 점프'하고 '멀리 날기' 위해서는, 그만큼 반드시 무릎을 굽히고 웅크리는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현타,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는 그 답답한 질문들은, 현재 정체된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도약하고 싶다는 강력한 성장의 욕구일 수 있다. 그러니 별 볼 일 없는 업무라는 생각이 들 지라도, 그저 시간을 때운 것이 아니라 '훗날 가장 멋지게 날아오를 날개 깃털 하나를 단단하게 심는 과정'으로 받아들여 보는 것이 어떨까?
제인 마크 Jane Mark
MindMark Lab은 행동신경과학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인간의 잠재된 욕망와 행동 원리를 분석하여,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위한 최적의 성공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휴먼 솔루션 연구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