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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량 Mar 10. 2021

잘 지내고 있어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었어요. 의욕과는 다르게 집중이 잘 안되더라고요,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가. 그래서 장을 보고 요리를 했어요.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쓰라고 하잖아요. 돈까스 만들어본 적 있어요? 두툼한 살덩이를 칼등으로 신나게 두드리고 밑간을 한 다음에 계란물을 입히고 빵가루를 꾹꾹 묻혀주면 끝이에요. 어릴 때 엄마가 자주 해주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직접 만드는 건 처음이었는데 굳이 레시피를 찾아보지 않아도 전부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 신기해요. 어릴 때는 뇌세포가 건강해서 그런 건지, 모든 게 처음이고 모든 게 신기해서 더 뇌리에 박히는 건지. 세세하게 기억나는 추억은 거의 다 어린 시절인 것 같아요.


요즘에요? 별 일 없어요. 글이요? 아아. 열심히 써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요즘은 통 글이 써지지 않아요. 하하 그러게요. 대단한 걸 써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전에는 활자로 쏟아내야만 겨우 덜어졌던 감정들이 있었거든요. 꼬리에서 꼬리를 무는 생각들? 뚜렷한 형태가 없는 잔상의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둥둥 떠있다 보면은요, 분명히 내가 만들어내는 생각 속에 있는데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순간이 오거든요. 그럴 땐 무언가를 써내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어요.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든 생각을 끄집어내야만 겨우 잠이 왔어요. 그 생각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다냐고요? 정말이에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평온해요. 어제 영화 한 편 봤거든요. 혹시 파이트 클럽 봤어요? 어릴 때 꽤 좋아하는 영화였는데 오랜만에 생각이 나더라고요. 거기서 주인공의 자아가 그런 말을 해요. 모든 걸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온다고요. 자꾸만 소유하는 것이 생겨서 그런 걸까요? 밤이 오면요, 커다란 창으로 도시의 불빛이 가득 차올라요. 내 것인지 모를 등불을 켜고 나면 이 거대한 도시에 내 지분도 조금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결국 나나 너나 똑같이 생긴 수백만 개의 먼지 입자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는 내 이름을 잊지 않을 거야, 뭐 그런 다짐도 가끔 해요.


아 어제는 꿈에서 한밤 중에 놀이공원에 갔어요. 한동안은 놀이공원 생각만 하면 먹먹해지던 때도 있었는데. 나이 먹나 봐요. 요즘엔 당신 생각도 잘 안해요. 생각할 일이 없거든요. 근데 어제는 당신 생각이 나더라고요. 계절과 함께 잊혀지는 사람이 있고 계절의 대명사로 남는 사람이 있고, 그렇잖아요. 웃기죠? 저는 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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