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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훈 May 08. 2024

외로운 늑대

- 경기 둘레길  860km 완주기 (2) -

 네팔의 안나푸르나봉 트레킹을 하다가 오묘한  우리 하나를 보았다. 마차푸차레(Machapuchare)! '생선꼬리'를 닮아서 이름 부쳐진 이 산은 원주민들의 성지로 알려져 입산이 금지된 곳이다. 2009년 봄, 아들과 함께 해외 트레킹 코스로 여기를 선택하여 걷다가 근처 로지(lodge)에서 여장을 풀었다.


석양이 질 무렵, 건너편 영봉들이 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중에서도 마차푸차레는 생선꼬리 모양 능선이 황금색으로 붉게 물들어 눈이 시릴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능선은 검붉다가 환해지고, 흰 구름과 함께 눈 덮인 영봉을 환상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 순간, 범접할 수 없는  모습에서 짙은 외로움 같은 걸 느꼈다. 외로움이 짙어지면 이토록 고혹스럽고 붉게 물드는 것일까. 저 정상아래 어딘가에서 길 잃은 늑대 한 마리가 처연하게 울어대는 듯, 밤하늘에 날카로운  하울링(howling) 소리가 메아리친다.


    (출처: photography :마차푸차레峰

     by  Emad Aljumah / Getty Images)


한 마리 늑대처럼 어슬렁거리며 길을 걷는다.

경기 둘레길 연천 9코스. 임진강 둑길에서 70대 중반의 할머니를 만났다.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여기로 와서 옻된장 같은 수제 식품을 만들며 살고 있다고 한다. 부부가 단조롭지만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는 그분의 표정이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과 닮아 보였다.

연천 10코스에선 대단한 둘레꾼을 만났다. 그는 9코스와 10코스를 합한 35킬로를 하루에 주파하고 남양주로 귀가한다고 하였다. 카니발 차량을 차박(車泊)용으로 개조하여 해파랑길, 남파랑길을 다닌다고 하니 찐 도보여행가답다.


경기둘레길은 60코스나 되고, 경기도 외곽 도로와 국유림, 시골마을, 강변길, 서해 해솔길을 연결한 장거리길이다. 그래서 교통편이 불편하여 여간 마음을 먹지 않지 않고선 추진하기 쉽지 않다.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어느 날, 걷는데 또 다른 고수를 보았다. 그는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50킬로를  20일 만에 다 주파했다고 자랑하였다.

하루에 평균 37.5킬로를 쉬지 않고 걸었다니 입이

벌어졌다. 보기에도 단단한 다리를 가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왜 그리 걷기를 좋아하시나요?"

"뭐,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시간이 남아서 걸어요"

무심히 돌아온 대답이 허술하고 실망스러웠다.

둘레꾼이라면 자연을 좋아하고 자유스러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큰 자가 아닐까.


                   ( 임진강의 겨울 전경 )  


길을 걸으며 한 가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하천변은 당연하고 길가나 국유림에도 쉽게 볼 수 있는 <가시박 덩굴>이다. 외래종 식물로 '식물계의 황소개구리' 소리를 듣는다. 어디든 가리지 않고 토종작물에 엉겨 붙어 생장을 방해하고 말려 죽인다. 보기에도 무덤처럼 흉측스럽다.

평택에는 험퍼리스(Humphreys) 미군기지가 있는데 그 옆으로 안성천이 흐르고 있었다. 길고 긴 천변길을 걸어가면서 지천으로 덮고 있는 가시박 덩굴을 보니 우리 생태계가 정말 염려스럽다. 대대적인 제거작업과 함께 근본적인 처방 없이는

멀지 않아 이 땅이 덩굴나라로 변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몰려온다.

      ( 안성천변을 덮고 있는 가시박 덩굴 )


매주 하루씩 1년 9개월 (2021.12~2023.8)이 걸린 경기 둘레길 860킬로를 혼자서 온전히 다 걸어 보았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800킬로라고 하니 나는 국내에서 그만큼 걸어본 셈이 된다. 걷기를  좋아하는 둘레꾼이 갖는 호사스러움이 있다면, 첫째가 자유로움이다. 언제 어디든 편하게 정하고 쉴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둘째는 치유(healing)를 경험한다. 걷다 보면 온갖 걱정, 아쉬움, 궁금함 등 잡념이 생기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잡념이 휘발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스스로 해결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였다.


셋째는 새로운 길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정표나 리본 표시가 붙어 있지만 60코스를 돌면서 길을 헤맨 경우가 코스당 2~3회는 되는 것 같다. 특히 산길 갈림길이나, 도시에 접어들면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스탬프를 찾아 하나씩 도장 찍는 일도 마치 숨바꼭질하는 거 같았다. 그러니 제 길을 찾아 한 코스를 마치면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맑은 공기, 숲 향기, 새소리  심지어 동물 축사에서 나오는 내음마저도 도심의 공해와 다른 친숙함으로 삶에 활기를 채운다. 우측 무릎이 불편한데도 별 탈없이 끝까지 잘 걸었으니 자연이 말없이 도와주지 않고서야 가능하겠는가.


                 ( 시흥 연꽃 테마파크 )


경기 둘레길은 15개 시군(市郡)을 연결하여 평화누리길, 숲길, 물길, 갯길로 구성되어 있다. 김포에서부터 우측으로 파주, 연천, 가평, 여주, 안성, 평택, 화성, 김포로 한 바퀴 도는 머나먼 길이었다. 둘레길이라기보다는 경기도 연결 도보길이라고 부르고 싶다. 차도와도 수시로 연결되어 있었고, 연천, 가평에는 국유림이 여럿

있어서 산불예방기간이 지나야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경기 북부와 남서부 지역은 도시개발의 지역차가 크다는 점을 육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연천, 포천, 가평 등 도시들은 북한과 가깝고, 높은 산들이 많아 시가지가 시골스럽고 자연의 모습이

잘 보존된 편이었다. 반면에 축사가 많은 안성, 평택은 도시개발이 진행 중이었고, 특히 화성시는 반듯한 시가지와 아파트 단지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부근 산업단지의 혜택을 많이 본 사례가  아닌가 여겨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연상된 화성이 신도시로 거듭 나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한편 대부도 해솔길에는 펜션, 카페, 차박용 캠핑장을 쉽게 볼 수 있어 바다풍경과 함께 외국에 와 있는 착각도 하였다.

                 ( 양평 산음 자연휴양림 )


고객만족경영에서 중시되는 진실의 순간(MOT; Moment of Truth)이 있다. 1980년대 스칸디나비아항공(SAS)의 얀 칼슨 사장이 경영개선을 위해 조사한 내용 중, 일선직원이 고객과 대면하는 시간이 15초 정도라고 하였다.

이 15초 안에 회사의 평가와 이미지가 결정되니

모든 역량을 MOT에 맞추어 경영전략과 개선노력을 기울여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는 MOT가 없을까? 왜 없겠는가. 살펴보면 여러 경우가 기억되는데 어릴 때 본 영화의 한 장면, 한 편의 詩, 한 마디의 충고, 이성과의 첫 만남....

짧지만 새롭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포스터에서도 인생길이 바뀌기도 한다. 나 역시도 주위의 권유나 지식 없이 어떤 MOT를 통해서 인생의 진로를 설정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즉흥적이 아닌

자신의 결단으로 말이다. 그리고  MOT를 인생의 에너지로 삼아 진지하게 쌓아간다면, 미래의 삶도  윤택해지리라  믿는다.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하여도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다다르듯이...

경기둘레길 구석구석 연결하고 정비하고 길을 내주신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선물로 주신 인증서와 마스코트도 기쁨으로 남는다. (끝)

         

                (완주 인증서와 마스코트 4개)


                                 2024. 5, 8 (수)  손  훈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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