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향기에 실린 5월의 공기는 달았다. 연극 공연을 기다리는 강당 안은 무척 시끄러웠다. 쌍쌍이 앉아 얘기하는 소리가 마치 한여름 매미 울음처럼 귓전에 울렸다.
"눈을 감고 이 소리를 들으면 뭐가 생각나세요?"
곁에 있는 파트너가 물었다. 눈을 감아 보았으나 시끄러운 대화 소리만 들릴 뿐 별 느낌이 없었다.
"저는 수영장 물속에 들어가면 숨을 멈추고 얼마나 견디나 시험해 봐요. 그렇게 하나 둘 세다가 이제 물 밖으로 빨리 나오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을 느껴요."
서양미술을 전공한다는 그의 대답에 참 섬세하고 남다른 감각을 가졌구나 하고 짐작했다. 캠퍼스에는 개교기념 축제를 맞아 젊은이들로 바글거렸다. 학생회관 가는 길. 간이 노점을 펼쳐 놓고 학생들이 주전부리를 팔거나, 자기 동아리에 들어와 달라고 이끈다. 한 학생이 널따란 엿 판을 배에 걸치곤 가위를 찰랑거리며 우리 둘 사이를 빙빙 돌았다. 호박엿을 사지 않으면 둘 사이를 갈라놓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발개진 그의 볼을 보며 얼른 엿 한 통을 샀다.
선배의 주선으로 만난 그는 이층 집 방 너머 지나가는 행인들 보는 게 취미라고 하였다. 표정과 걸음걸이, 둘러 맨 가방을 관찰하며 캐리커처(인물 풍자화) 그리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린 버스를 탔다. 승객 몇 명이 서서 손잡이에 의지한 채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는 그런 모양을 물끄러미 보더니 정육점 천장에 걸린 붉은 고기 덩어리가 연상된다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섬뜩함을 느껴 말문을 잃었다. 다시 만나더라도 내가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지 자신이 없었다.
감성과 색감이 풍부한 그의 생각과 청순한 모습에 끌리긴 하였으나, 애프터 신청을 하지는 못했다. 그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인연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대화와 분위기가 생각나는 것은 왜 그럴까.
'카톡'이 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2015년 남미 갔었던 차중식입니다. 서울 올라와서 정형외과 레지던트 하고 있어요. 오늘 선생님 생일이라 뜨길래 연락드립니다. 그때 기억이 너무 좋아서 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우리는 6년 만에 다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처음 만날 때에는 젊고 훤칠한 의대생이었는데 어느 듯 의젓한 레지던트로 나타났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물어보았다.
"그때 동행했던 분과는 잘 지내고 있나요?"
"네, 지금은 결혼해서 제 아내예요.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아직 아이는 없고요."
그는 트레킹 하는 동안 우리와 잠시 있다가 뒤에 온 지금의 부인 일행을 만나서 3박 4일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주 스쳤다. 그 한 쌍은 제삼자가 보기에도 잘 어울릴 만큼 다정했고 멋져 보였다. 나는 내심 잘 되기를 바랐는데 결혼하여 잘 지낸다고 하니 은근히 기뻤다.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푸른 탑) 국립공원. 세계 10대 절경중 하나이며 W자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오래전 지각변동이 일어난 땅을 빙하가 휩쓸고 지나가며 만든 독특한 지형으로 여름에만 개방된다. 탁 트인 시야 너머 검푸른 구릉지대가 끝없이 펼쳐지고, 길가엔 빙하 녹은 물이 떨어지며 색색가지 야생화들이 지천이었다. 푸른 탑 모양의 정상 바위, 새송이 버섯 같은 봉우리들, 설산과 호수를 보며 걷노라면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여기 트레킹의 압권은 험준한 설산 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사태를 직접 목격하는 것이다. 떠나는 날 새벽, 텐트 속에서 곤히 잠들다가 깨우는 동료 따라 밖에서 본 밤하늘! 선명한 은하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고 어디선가 유성이 날아가고 있었다. 내 별도 어디 있을 듯 밝고 평온한 하늘 세계였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여기서 처음 만났던 중식 씨와 함께 슈퍼에서 와인, 스테이크, 소시지 등을 사서 먹었다. 우리 일행들은 트레킹이 준 감흥과 추억거리를 밤새 나누었다. 여행에서 누군가 만나면 금세 친해지는데 또한 금세 헤어진다. 서로의 방향과 목적이 다르니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귀국해서도 간간히 연락을 주다가 뜸했는데 이제 다시 만나니 각별한 마음이 든다. 좋은 인연이라 여겨서 이 친구와 오래도록 연락하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했던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있었다.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4일간의 사랑에 흠뻑 빠지게 했던 사진작가 로버트를 따라가야 할지 말지 신호등에서 망설이는 장면에서 갑자기 아내가 재채기를 했다. 그것도 크게. 애절한 감정에 몰입되고 있었는데 김이 샜다. 그러자 아내는
"사랑의 감정과 재채기는 참을 수가 없다오."
하며 마무리를 짓는다. 대통령 후보 부인이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 녹취록을 공영방송에서 보도한 일이 있었다. 7시간 분량 중 일부인 20여 분으로 편집해 방송하자 본방 사수니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니 말들이 꽤 많았다. 정작 이걸 본 아내 왈,
"아이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더니 꼭 그 꼴이네."
한 마디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그의 몸짓과 위트가 재미있다.
언젠가 친구들 부부와 차로 이동하며 주식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내가 주식거래를 잘하려면 손절매를 타이밍 맞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여 모두들 웃음이 빵 터졌다. 손절매를 어떻게 아느냐면서. 아내는 그건 기본 상식이 아니냐면서 오히려 되받아쳤다. 그런데 오래 살아도 주식하는 걸 보지 못했다. 평소에도 '강한 부정은 긍정'임을 나에게 주입시켰다.
봄비 내리던 명동거리. 메트로 호텔 커피숍에는 구수한 커피 향과 함께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가 낭송되고 있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목마는 하늘에 있고 / 방울소리는 귓전에 찰랑거리는데.. / 가을바람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내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 신상에 대한 질문을 생략하고 나는 이외수의 소설 <칼>에 대한 독후감부터 풀었다. 다분히 지루했을 텐데 경청하는 듯 딴 생각하는 듯 애매한 표정이었지만 조용히 들어주었다. 간간히 던지는 그의 얘기가 유머스럽고 재미있게 들려왔다. 그렇게 해서 만나다 보니 '아! 이 사람하고 살게 되면 심심하지는 않겠구나'하는 확신 같은 게 생겼다. 그게 동반자로서 첫걸음일까.
세상 물정 모르고 눈치 없는 나와 사느라 마음고생 많았다고 푸념하는 그도 어느덧 경로 교통카드를 받았다. 최근에는 지하철 탑승 공짜 기념이라고 경기도 용문사까지 먼 길을 다녀왔다.
인연(因緣)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뜻한다. 내가 무조건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서, 또는 상대방만 가까이 다가온다고 하여 맺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함께 보내는 시간도 축적되어야 함을 느낀다. 그러니 여러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남은 인연들이 감사하다. 이제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좋아지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아내가 가까이 다가와서 좋았던 것처럼.
2022년 2월 1일 설날에 / 손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