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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Aug 28. 2023

출판사를 퇴사했다

파주 출판단지는 늪지대 위에 세워졌다. 약한 지반에 회사 사옥이 기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해본 적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자주 기울 때마다, 근방 산책을 하면서 저 늪에도 꽃이 피는가, 물고기가 사는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했다. 생명이 안 자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때는 자유로가 꽝꽝 언, 늪에는 얼음뿐인 겨울이었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나. 회사 동료가 통근버스에 앉아 있는 나를 사진 찍어준 적이 있다. 나는 항상 맨 뒷 좌석, 네 좌석 중에 맨 끝에 앉고는 했으니 앞문으로 탄 그는 나를 한 번에 봤겠지. 그가 보내 준 사진에 내 표정은 무척이나 권태로워 보였다. 내 눈썹에 털이 그렇게나 많았나, 나는 검은 눈썹을 찡그리고 땀으로 반짝이는 이마를 걸어놓고 남색 셔츠 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안광 없는 눈빛과 비뚤어진 입술은 내가 보기에도 편치 않았다.


통근버스의 분위기는 침잠에 가깝다. 교정지를 보는 사람들, 원고를 읽는 사람들, 자는 사람들. 블라인드를 걷으면 우리 함께 눈 부셔한다는 게. 우리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버스에 따라 같이 덜컹거리고 등받이에 부딪히고 멈추고 다시 가고 하는 게. 나는 그런 게, 왜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퇴근 날인 오늘, 앞문으로 탔을 때 내가 늘 앉던 그곳에 한 남자가 비 묻은 머리를 털고 빗물로 반짝이는 이마를 닦으며 검은 셔츠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난 구태여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괴로워 그런가요. 나는 하마터면 그 말을 할 뻔했다. 곧이어 조명등이 꺼지고 버스는 출발했다. 비 오는 자유로. 정말 세상이 끝날 듯 퍼붓던 내 첫 출근 날과 닮아 있는 거 같네. 나는 마지막 날까지 무엇이든 이어 붙이려 하고 있는가 싶어서, 흐흐- 하고 웃었다.


마지막 퇴근 지문을 찍고 사옥 1층 출입문이 닫히기 전까지 좁고 가파르게 위로 뻗은 계단을 봤다. 자동 조명등이 꺼지고 출입문이 닫히면서 계단은 천천히 모습을 감췄다. 출입문 반사 필름에는 우산을 든 내 모습만이. 일 년을 넘게 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내 동료들은 오르고 있다. 난 다른 곳에서 저 계단을 오를 것이다. 역시 흐흐- 하고 웃음이 났다. 버스 정류장 건너편 늪에 꽃이고 풀이고 만발한 것을 보았다. 퇴근 버스를 타지 않은 지 꽤 돼서 몰랐는데. 갖은 식물이 자라더라. 아마 물고기도 있겠지.


옆의 남자가 나를 흘긋거린다. 나는 이제 매일 아침마다 이쪽의 한강을 볼 일은 없겠죠. 당신은 얼마나 봤죠. 얼마나 볼 거죠. 괜찮은가요. 당신 정말 괜찮은가요. 나는 이 말을 하고 싶다. 정말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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