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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May 04. 2021

시절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성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아온 대학 1년 후배이자 네 번의 계절을 함께 견뎠던 룸메이트였다. 내가 전 연인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도, 주성이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그러니까 맨날 술을 마시고 취해서 이리저리 전화해서 사랑한다며 주사를 부리던) 때, 주성이는 수줍게, 내게 지금 다니는 학교와 학과가 좋으냐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역시나 그때에도 술에 취해 있던 나는, 왠지 모를 애교심이 솟아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강력히 말했다. 그는 아주 간단히 알겠다고 답하더니, 다음 해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렸고 그렇게 나의 후배가 되었다. 


그가 학교를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영향을 미친 것은 얼마 없었을 테지만 나는 뭔지 모를 책임감을 느꼈고, 항상 그에게 본받을 만한 선배로 남아야 한다는 모종의 자기 압박에 시달렸다. 그래서 군인 시절 휴가 나와서도 그와 만날 때면 항상 내가 밥을 사는 등 아주 사소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멋진 모습은 최대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나와 같이 살게 된 이후로는,
그런 노력 따위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나의 취업준비의 시기가 길어지면서 멀쩡하지 않은 나의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주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취준을 할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는 방에서 뒹굴 거리다가, 그가 집에 들어오면 급하게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척도 많이 했다. 우울을 조절하기 위해 알약 몇 개에 기분이 오가는 상태에서도, 나는 나름의 간지(!)를 챙기고 싶어,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바보 같은 행동을 한 거다. 


그럴 때면 우린 같이 장을 보러 갔다. 주성이는 요리를 잘했다. 그는 요리를 하면 예쁘게 플레이팅을 해서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무엇보다 그가 김치찜에 아주 진심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심심할 때마다 김치찜을 시켜 먹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을 때면 서로의 근심을 물었고 별 일도 아닌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말했다. 누구 하나 답을 줄 수 없는 처지인 걸 알지만, 그냥 그대로도 좋았다. 그저 서로의 거지 같은 생활을 반찬 삼아 함께 밥 먹는 게 좋았던 거다. 

하루는 꽤 큰 기업의 공채 면접에서 멘탈을 전부 빼앗겼고 그 대가로 5만 원의 면접비가 담긴 봉투를 받았다. 회사의 로고가 박힌 이 봉투를 마지막으로 난 다시는 이 건물에 올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에 전기라도 흘려 놓은 듯 저릿했다. 그날은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고 양복을 입은 덕분에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난 꾀죄죄한 모습으로 자취방으로 돌아왔고 도착하자마자 곧장 주성이의 방으로 가 누워 버렸다. 퍼질러진 나에게 주성이는 면접이 어땠냐고 물었고 나는 거지 같은 면접관 이야기를 풀어 댔다. 우린 그날 내가 받은 면접비 5만 원으로 육회와 연어를 시켜 술을 마시며 인생의 거지 같음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난 그해 겨울 취업을 했고 그도 곧 졸업을 앞두고 몇 곳의 면접을 봤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고, 주성이는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위해 원룸을 구해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주성이의 방은 내 방에 비해 매우 좁았고 무엇보다 나의 방해가 심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오래 견뎠다고 생각하는 게 맞았다.


그가 떠난 후 새로운 룸메이트 H가 왔다. H와는 지금껏 같이 살고 있는데, 우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고 있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심하지도 않다. 주성이와 살았던 시절처럼 같이 밥을 먹고 함부로 서로에게 늘어지던 시간은 없지만 서로를 향한 응시가 있다.하지만 늦은 저녁이 되면, 주성이에게 '기분도 거지 같은데 김치찜 갈기실?' 메시지를 보내면, 반대편 방에서 성대가 찢어질 듯 '콜!!!'이라고 외치고, 서로 빵- 터져서 웃던 날이 가끔 떠오른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자 퇴사를 했을 때, 주성이는 오랜만에 나를 불러냈다. 우린 고기에 술을 마셨고 그는 큰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직장생활은 힘들었고, 우린 서로 직장 상사 욕을 하며 술잔을 채웠다.


"그래도 형이랑 살았을 때 재밌었는데."


우린 조금 취한 채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쌀쌀한 초봄에는 통학을 하느라 피곤하다는 얘기와 꽃구경 다녀왔다며 떠들었지. 여름에는 더워서 못 살겠다며 내 방에만 있는 에어컨을 켜고 둘 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살았었잖아. 가을에는 새 옷을 샀는데 어울리냐고 물었고, 겨울에는 난방료를 보고 까무러쳤던 거 기억하지. 우린 그날의 추억을 술잔에 녹여 내어 들이켰다. 그러자 계절들 사이에 끼어 있던, 평범하게 즐겁던 일들이 떠올랐다. 


파스타를 만드려고 와인을 넣어야 하는데 코르크 오프너가 없어 자취방 앞 맨홀 뚜껑에다가 병목을 치다가 그만 와인 병이 산산조각 나서 내 손가락이 다 찢어져 피를 흘렸던 일 (주성이는 바로 약국으로 뛰어가 구급약을 사 왔고, 우린 그날 초대했던 간호사 친구에게 너네 대학 나온 애들 맞냐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술에 취한 채로 온갖 주정을 부리던 나를 주성이가 침대에 눕히고 재운 일, 애인에게 차인 날 그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던 일,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기 위해 시장과 마트를 돌아다니며 장을 보고 짐을 나눠 들고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서 같이 퍼먹은 일, 내 방에 바퀴벌레가 나와서 그와 내가 협동으로 잡은 일, 상대방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날엔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조용히 해준 일...


바보 같은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술에 적당히 취했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그렇게 주성이도 나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내 뒤숭숭한 기분을 품은 채 자취방에 도착했다. 주성이가 지내던 방에서, 지금의 룸메이트인 H가 "안녕~"하고 인사했다. 주성이가 있던 방에서 H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저 방에 살던 주성이와 같이 보냈던 그 재밌던 일들은,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다. 방금 비운 술잔으로, 방금 주성이와 내가 나눈 추억들로, 이렇게 내 삶의 한 시절이 떠났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머물러 있던 시절을 떠나보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 시절이 마무리되면 그 시절 속에서 함께 했던 이들과 영원히 끝나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절에 같은 웃음을 나눴던 이들이, 이제는 다른 길과 다른 삶을 살면서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주성이와 술을 마시며 지난 시절을 추억하고, 옛 주성이의 방에서 나를 반기는 H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그냥 웃기로 했다. 


한 시절은 꼭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한 시절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옛 시절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시절을 맞는 것이 용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이전과는 다른 나이와, 다른 환경과,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차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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