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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공간이 부족해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과 소장, 업데이트에 관하여..

by 책 읽는 오리

나의 아이폰 저장 공간은 512GB이다.

매일 나의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읽던 책의 리뷰를 위해 사진을 찍으며, 오늘 하루 나의 모습을 담기도 한다.

제일 많은 용량을 사치하는 고화질 가족사진은 언제든 쓸 데가 많아 지울 수가 없고 B컷조차도 내겐 너무 소중해 건드릴 수 없다.

나중에 돌아볼 오늘 내 아이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애틋해져 일상 속 매일 찍는 아이들의 사진 또한 지우기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그동안 클라우드를 이용하지 않은 건 아니다.

네이버 클라우드 MYBOX를 비롯해 구글드라이브도 꽉 채운 지 오래인지라,

유료 결제를 하고 또 그 다음 용량의 추가 결제를 하다보니 부담이 되어 구독을 중지했다.

아날로그식으로 외장하드에 백업도 해봤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매번 백업해 놓기가 이렇게나 힘들다니,

두 번째 외장하드로 옮기다가 잠정 중단..


그 다음 처절한 용량 확보의 단계는 어쩔 수 없이 장기간 사용하지 않는 어플을 지워 나가는 것.

저장공간 부족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지경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자주 그러한 최대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급박한 상황에 등떠밀려 눈물을 머금고 내가 가진 동영상 중에 가장 소장가치가 낮은 것 몇 개를 선택해 지운다. 그러면 당분간 20-50장 정도는 찍을 수 있는 용량이 확보된다.





용량이 꽉 찬 핸드폰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일단 핸드폰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끊임없이 Apple 계정 제안에 알람이 뜨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에 알람이 뜬 채로 살아가야 한다.

업데이트를 당장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시간만큼 나의 마음에는 조바심의 틈이 넓어진다. 용량이 줄어든 만큼 내 마음의 씀씀이도 인색해진다. 또 뭘 지워야 하지.. 내 인생에 한 번뿐인, 다시는 오지 않을 내 아이들의 순간을 지우는 건 정말이지 내겐 너무나 큰 곤욕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꽤나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나는 오늘도 사진 어플을 아낀다.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사진 어플을 터치하는 순간, 내 손가락 무게는 천근 만근이 된다.


이미 sns에 업로드 한 사진이나 중복된 사진들은 틈틈이 지우며 오늘도 겨우 3.37GB를 남겨 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한 줄기 희망을 기다린다.

어느정도 적당한 부담감의 합리적이고도 저렴한 클라우드 서비스가 출시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내 인생의 저장공간은 어떨까?

기억하는 만큼, 나의 인생의 용량은 넉넉해지는 걸까?

저장공간이 부족한 모습으로 늘 알람을 달고사는 인생이 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말을 더이상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나로 가득찬 이기적인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비싼 클라우드 서비스를 구독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다. 늘 배우고 비워내며 편견과 고정관념들로부터 스스로를 넓혀 간다면 어느 누구나 온전한 1인분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런 마음의 넉넉함으로 다른 이들의 필요나 마음을 채워주는 그런 대용량의 인생으로 내 앞에 놓인 1인분을 잘 살아내고 싶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두는 것 중 하나가 사진이다.

사진은 온전한 그 시간 속의 나를 간직하는 추억이고 기록이기 때문이다.

편리한 기록의 수단으로서의 사진을 축적하고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다. 기록하는 것조차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좀 슬프기도 하다.


나의 가장 큰 숙원사업은 핸드폰 용량 정리를 통한 기록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품은 그 염원을 섣불리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에 돈의 논리가 들어 있어 슬프고 또 비참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기록하고 싶은 순간이 많은 삶을 산다는 것,

내 아이들과 내 삶의 기록들로 나는 이미 추억의 부자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위축이 되면서도 뜻밖의 위로를 받는 아이러니를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기필코 용량 정리를 할 것이고

내게 꼭 맞는 백업 클라우드를 발견해낼 것이며

원없이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는 삶을 살아낼 것이다.


일단, 오늘은 3.37GB 안에서 잘 살아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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