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작가님의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고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전쟁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뉴스 속 숫자와 연표, 박물관의 패널처럼,
이미 끝난 일, 혹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그래서 루리 작가님의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도
나는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프지만 결국은 정리 가능한 이야기일 거라고,
읽고 나면 마음 한켠에 ‘연민’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얌전히 놓아두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이해로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은 설명하지 않고,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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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 지점]
“전쟁은 누구의 탓도 아닐 수 있다는 말“
이야기는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과거는 미색 종이 위에,
현재에 가까운 시간은 흰 종이 위에 쓰였다.
종이의 색이 바뀔 때마다,
기억이 얼마나 쉽게 퇴색되고 왜곡되는지를
독자는 몸으로 느끼게 된다.
누군가는 나나 올리브를 할머니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젊은 사람으로 말한다.
어떤 이는 그녀가 이미 죽었다고 하고,
개가 한 마리였는지, 여러 마리였는지도 엇갈린다.
이 불일치는 혼란이 아니라 질문을 만든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한복판에서
이 문장이 나온다.
“그저 회오리바람이 강한 것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이 문장을 믿고 살기에는, 아직 무서웠기 때문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너무 쉽게 책임을 비켜갈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상황’이라는 이름의 회오리바람 뒤에 숨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세계를 만들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 문장이
쉽게 부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말이 가해자의 언어가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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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 지점]
“강아지의 시선이 만들어낸 윤리”
이 책에서 강아지는 중심에 있는 듯하면서도
이야기를 소유하지 않는다.
강아지는 판단하지 않고,
다만 곁에 머문다.
그 시선 덕분에 독자는
‘나나 올리브라는 인물’을
평가하지 않고 응시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보호자였고,
누군가에게는 스쳐간 사람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존재.
전쟁 속에서 모두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나나 올리브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회오리바람이 되어주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이 선택은 영웅적이지 않다.
숭고하다고 말하기에도 조심스럽다.
그저, 곁에 남아주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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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책을 덮고 남은 질문]
“서로가 서로에게 회오리바람이에요.
함께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이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회오리바람인 거예요.”
이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가장 위험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을까.
너무 애쓰는 마음,
너무 깊이 관여하는 태도,
너무 쉽게 곁에 머무는 선택을
우리는 자주 비효율이나 미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책은 말한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한 자리에서도
사람을 살린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지속적인 마음이었다고.
⸻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여전히 질문 속에 있다.
나는 누군가의 삶에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만큼
곁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상황이 아니라,
사람을 선택해 본 적이 있는가.
아직은,
이 문장을 믿고 살기에는 버거운 게 사실이다.
가족, 친구, 지인이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나서
누군가의 곁을 지킨다는 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내 안에서 선명해졌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아무도 남지 않는 것보다,
누군가가 남아 있었다는 기억 하나가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나나 올리브를 단지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기보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함께 있기를 택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 역시 그렇게 불릴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