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Aug 12. 2022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1시간이라면...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1 - 강정해안도로

첫째 딸 단비가 네 살이었을 때, 단비를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돌아오는 길 신호등이 하나 있었다. 빨간색 신호등에 걸리면 1분 정도 단비 눈을 보고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단비에게 곤 했다. 

"단비는 아빠가 좋아?"

"네"

다음에 이어지는 질문은 늘 같았다. 대답의 구체성에 따라 아이의 표현력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어떤 점이 좋아?"


그때마다 단비는 두 눈을 좌우로 굴리며 뭐라 대답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잠깐의 망설임 끝에 나오는 대답 늘 같았다.

"좋아서요"


나는 이 네 글자가 너무 좋았다. 인과관계 - 좋으니까 좋아하는 걸까, 좋아하니까 좋은 걸 -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함축성, 네 글자 안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아 전달하는 천진한 간결함이 좋았다. 사실 '좋아서요' 앞에 두 글자가 생략되어 있다.

"(그냥) 좋아서요"


뭔가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그냥 좋다'를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없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좋아하는 이유를 대기 힘든 법이니까. 좋아하는 이유 중  먼저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깨닫고 마는 것이다. 그냥 좋다,로 퉁 치면 된다는 걸.

내게는  '그냥 좋다' 한마디면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강정해안도로. 나는 강정해안도로 그냥 좋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됐을 때부터 끌렸고, 지금도 그렇다. 이유 없이 좋고, 하염없이 좋다.


강정해안도로의 노을 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감정의 찌꺼기들을 저 노을이 자기장처럼 빨아들여 어둠 저 너머로 데려가 주는 듯다. 감정의 블랙홀이랄까. 강정해안도로의 노을은 너무 붉지도, 너무 푸르지도 않은 적당한 물듦과 어디까지가 낮이고 어디까지가 밤인지 알 수 없는 적당한 모호함으로 늘 닮고 싶은 뒷모습을 남겼다.


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나도 저렇게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지. 저렇게 여운이 길게 남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내  마음속 선이 하나 주욱-하고 그어졌다.

감정변경선.

어느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표현인데, 그는 애월해안도로 입구가 자기의 감정변경선이라고 했다. 그곳에 닿는 순간부터 자기의 감정이 바뀐다나. 그런 기준이라면 나의 감정변경선은 강정해안도로다. 참 신기한 일이다. 불안, 근심, 걱정 따위의 불투명한 감정은 감정변경선에 닿는 순간 뭉클하고 몽글몽글한 감정이 되 녹아내 이내 투명해졌다. 투명해진 이 감정을 한 단어를 표현하면 분명 행복이라는 단어에 닿을 터. 그래서 강정해안도로는 내게 '행복입장선'이기도 하다. 




노을을 바라보는 건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 죽비이기도 했다. 인생이 영원한 게 아냐. 너도 저 노을처럼 흩어지고 결국 사라질 날이 올거야. 그러게. 나도 언젠가는 저 노을처럼 어둠에 잡아먹힐 날이 올텐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었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기에 삶은 아름답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원천은 죽음인지도. 그래서 유독 예술작품 중에 삶의 유한성을 노래하는 작품이 많은 것일지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헬렌 켈러는 인생에 3일만 남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나를 가르쳐주신 설리반 선생님을 찾아

그분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영화 「돈 룩 업」은 묻는다.

내일 혜성이 지구 충돌한다면 당신은 남은 하루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내게 남은 시간이 사흘이라면?하루라면?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시간을 좁혀본다.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1시간이라면?


나는 강정해안도로를 걷겠다. 가족들 손을 잡고 노을 지는 강정해안도로를 걷겠다. 앞에 30분은 노을을 마주 하고 말없이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강정해안도로의 끝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내 인생도 질 때가 되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뒤에 30분은 지는 해를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겠다. 돌아오는 길은 가족과 함께 걸을 것이다. 가족의 눈을 바라보고 다 같이 두 손 잡고 한 명씩 마주 보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행복한 생을 살았으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남은 가족들이 덜 슬퍼해도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표현에 인색해서 자주 마음을 꺼내놓진 못했지만 사랑한다고.

마지막 순간에는 석양이 어둠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자기의 온 힘을 다해 빛을 토해내듯, 내 온 힘을 쥐어짜 마지막 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 미소를 머금은 채 고 싶다.


잠깐, 얘기나온 김에 가족들한테 부탁 하나 하자.

사람이 죽고 나서도 청각은  잠시 동안 유지된다고 하더라. 의사의 사망 판정이 내려지면 담담하게 귀에 대고 한마디만 해주길. 그동안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이상 인생 바다 예찬으로 시작해 인생 예찬으로 끝나는 이야기.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