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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언니 May 14. 2024

강아지 횡단보도 건너기

횡단보도를 잘 건너고자 개모차를 뽑았습니다.


“자, 가자아아~~~”

콩콩콩콩 총총총총


귀가 안 들리는 슈렉이는 ‘가자’라는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 것일까? 파란불로 바뀌는 신호등을 보는 것인지, 미세하게 당겨지는 목줄의 감각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옆 사람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인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슈렉이를 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 1년 전부터 그랬다.


작년 봄 몸에 이상이 생긴 후, 슈렉이는 걷는 것을 힘들어했다. 자기 딴에는 애를 써서 한걸음을 떼는 것이었으나 평소의 걸음걸이를 0.2배속으로 늘린 것처럼 보였다. 10분을 넘게 걸어도 아파트 현관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슈렉아 쉬야 딱 한 번만 하자. 응? 제발.”


그나마도 간식으로 어르고 달래야 몇 걸음 떼는 수준이었다. 간식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강아지가 먹는 것을 포기하고, 산책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강아지가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할 정도였으니……


목욕하고 나와서 깨끗한 앞발 입니다 :)


아파트 단지 밖에는 왕복 8차선의 횡단보도가 있다. 그때의 슈렉이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파란불이 꺼지기 전에 횡단보도의 절반을 채 못 걸어갔다. 나는 슈렉이와 신호등을 번갈아 확인하다가, 파란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슈렉이를 번쩍 안아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곤 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슬펐다. 슈렉이의 발걸음은 추운겨울에 내리는 눈 같았다.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 금방이라도 슈렉이가 녹아서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아픈 슈렉이를 보면서야 횡단보도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호가 불필요하게 길다고만 생각하던 나에게는 충격이자 깨달음이었다.  


이제는 아주 건강해요! 올 초 구정에 윷놀이했어요.


하루는 슈렉이가 컨디션이 좋은지 아파트 단지 밖까지 산책을 나가겠다고 했다. 줄기세포 주사와 전기침 치료를 병행하고 극적으로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이다. 8차선 횡단보도를 다 건너왔는데도 아직 파란불이었다.


“잘했어, 우리 슈렉이 너무 기특해. 정말 장해. 우리 슈렉이 건강하죠오오?”


감격에 찬 하이톤의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칭찬하고 있는 여자.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에는 딱 미친 여자 같겠지만 기쁜 걸 어떡해.

총총총총


그날 이후 슈렉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을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 어느 날은 가뿐히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하고, 어느 날은 파란불이 깜빡일 때쯤 건너기도 하고, 어느 날은 빨간불이 될 때까지 시간을 다 써야만 횡단보도를 겨우 건널 수 있기도 했다. 그걸로 슈렉이의 컨디션을 가름했다.


이제 뒷다리가 건강해져서 한발 들고 쉬야 가능/ 얼굴털을 너무 밀어 못생겨졌지만 여전히 행복한 슈렉.


보통 줄기세포 주사를 맞고 온 당일은 극심한 스트레스로(강아지가 병원 가는 것을 무서워하거든요.) 컨디션이 좋지 않다. 내가 매일 산책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치료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 같다. 기온이 높은 대낮보다는 선선한 저녁이 컨디션이 좋고, 밥을 먹기 전보다는 밥을 먹고 나올 때 힘이 좋다.


컨디션이 정말 좋은 날은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기도 한다. 13살 노견이 깡총깡총 뛰는 것을 보는 날은 네 잎클로버라도 찾은 기분이다. 토끼가 된 강아지가 너무 예뻐서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경이로운 눈빛을 아낌없이 보낸다. 매번 “아 이걸 영상으로 남겨놨어야 하는데.”라고 아쉬워하면서.


이럴 때 슈렉이는 빗방울 같다. 바닥에 떨어지면 통통 튀어오르는 빗방울. 기왕이면 슈렉이가 강한 장대비가 되면 좋겠다. 바닥에 닿자마자 아주 높이 튀어오르도록.


혹시라도 슈렉이가 못 걷게 될까봐 개모차를 샀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 걸어서 사놓고 쓰지를 않는다는….


P.S. 슈렉이에게 디스크가 발병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걱정할 상황은 넘겼지만 여전히 2~3달에 한 번씩 줄기세포 주사를 맞으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이면 13번째 주사를 맞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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