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현실의 경계

영화<아노라>

by 씨네진

사랑은 언제나 허상 같은 현실을 제공하지만 관계는 현실적이고 따뜻한 온도를 기대한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가진 영원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계급의 문제를 넘으면 타인과의 교감이 자연스러울 것인가? 그것도 갈수록 태산으로 다가오는 관계의 어려움에 빠진다.



2024년 개봉한 <아노라>는 성 노동자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사랑과 현실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미 여자 주인공의 직업이 언급되면서 관객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 이야기 아니면 상황을 전복시키는 내용을 예측하리라. 그러나 영화는 그녀의 삶을 선정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성노동자의 정체성을 통해 계급 간의 격차와 편견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성노동자라는 단어를 썼을 때 낯설지도 모른다. 부연하자면 성노동은 인류 문명과 함께한 직업으로,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인식과 정책이 달라져 왔다.



고대에 성매매는 신성한 의식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그리스의 헤타이라와 로마 제국의 성매매는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 이후 성노동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근대에는 규제와 금지가 강화되었다. 20세기 들어 미국과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성매매 금지법이 시행되었지만, 음성적으로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성노동자 권리 보호와 성매매 근절 정책이 대립하는 가운데, 단순한 법적 규제보다 노동 환경

개선과 사회적 낙인 해소 등의 논의가 필요하다.




뉴욕의 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노라.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성 노동자로, 매일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의 일상은 빠르게 흐르지만, 감정은 언제나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러시아 재벌가의 아들 이반을 만나게 된다. 부와 명예를 타고난 남자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여자의 만남.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영화 『아노라』는 그런 익숙한 서사의 틀을 깨고, 현실의 냉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반은 아노라에게 진심 어린 사랑을 속삭이며 결혼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감정으로 유지될 수 없다. 이반의 가족과 사회적 배경, 그리고 아노라가 겪어온 삶의 무게가 두 사람 사이의 거대한 장벽이 된다. 이반의 저택을 방문한 아노라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과 닫힌 문들을 지나야 만 한다. 이 공간적 설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신분 차이의 상징이다. 그녀가 그곳에 도달하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시험대에 오른다.




"너와 결혼하면 돈 한 푼 없어도 행복할 것 같아. “


이반의 이 대사는 영화 전반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사랑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혹은 우리는 결국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존재일까?





아노라는 사랑을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처럼 취급되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반의 곁에서 떼어놓으려 한다. 이반의 부모들은 그들을 이혼시키기 위해 뉴욕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긴 여정에 동참한다. 그들은 단호하게 아노라의 가족까지 없애버릴 수 있다고 협박한다. 아노라는 부모 앞에 무능한 이반을 보고 이혼을 결심한다.






한편, 그녀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인물, 이고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노라'는 주인공의 우즈베키스탄식 이름으로, 그녀의 정체성과 문화적 배경을 상징한다. 이름 자체는 '석류', '빛', '밝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영화 속에서 그녀의 내면과 삶의 희망을 나타낸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의미를 찾아준다. 이반이 주지 못했던 안정감과 이해를 보여주는 이고르는, 그녀에게 사랑이 아닌 '존중'을 가르친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션 베이커 감독특유의 사실적인 연출과 깊이 있는 캐릭터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회적 편견과 계층 격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션 베이커 감독은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 등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적인 촬영 기법과 자연광을 활용한 카메라 워크로 현실성을 강조한다.



특히 영화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배경과 공간의 대비다. 브루클린의 좁고 어두운 방과 러시아 재벌가의 화려한 저택이 번갈아 등장하며, 두 세계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은 아노라가 마주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영화의 음악은 감정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며, 감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특히 클럽 장면이나 아노라와 이반이 함께하는 로맨틱한 순간에는 몽환적인 멜로디가 사용되어 꿈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갈등이 고조될수록 음악은 점점 불안정한 리듬을 띠며, 현실의 무게를 강조한다.






이 영화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비틀어 사랑과 현실의 경계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아노라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영화는 "사랑이면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계층 구조와 그 속에서 개인이 맞닥뜨리는 한계를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영화는 자아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노라는 단순히 이반과의 결혼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려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한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찾는 성장 서사로 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아노라가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그 순간, 영화는 관객에게 그녀의 선택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 『아노라』는 계급과 사랑 사이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 화려한 러시아 재벌가와 뉴욕의 어둠 속에서 그녀는 사랑과 현실, 환상과 교감을 넘나 든다. 이반과의 사랑은 허상처럼 다가오지만, 이고르와의 관계는 현실적 온기를 지닌다. 아노라는 구원과 인정 대신 자신만의 독립된 길을 선택하며, 영화는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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