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의 전리품

- 방브 벼룩시장-

by 씨네진


우리는 왜 오래된 것들에 끌릴까. 흠집 난 유리잔, 빛바랜 사진, 벗겨진 촛대엔 단순한 향수를 넘어선 시간이 깃들어 있다. 오래된 것들은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의 의미를 선물해준다.


파리 남쪽 끝, 포르트 드 방브 역 근처의 벼룩시장에 이르면, 그런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일요일 아침의 방브(Vanves) 시장은 한 세기를 건너온 물건들이 햇빛 아래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낡은 천 위의 유리잔, 흑백사진, 바랜 그림과 장신구들—마치 오래된 다락방이 거리 위로 펼쳐진 듯한 광경 속을 걷다보니 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오래된 것들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물건 사이를 거닐다가, 작은 반지 하나를 발견했다. 은 테두리에 박힌 검은 크리스털은 깊고 묵직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고리는 낡았지만, 보석은 살아 있는 듯 반짝였다. 문득 그 반지의 주인을 상상해본다. 고풍스러운 귀족의 부인이었을까, 푸줏간 주인의 풍채 좋은 아내였을까. 손에 끼우고 햇살 아래 들어 올리자, 주름진 내 손이 낯설도록 고와 보였다. 그 순간,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지나간 시간과 손길, 상상이 겹겹이 쌓인 누군가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낡은 반지는 여행객으로서 간직한 나만의 기억 상자가 되었다.


벼룩시장 구석구석, 오래된 그림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래고 긁힌 액자, 물감 냄새가 스민 캔버스—모든 것이 시간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울고 있는 아이의 초상 앞에 멈춰 섰다. 하얀 깃털 장식 같은 옷을 입은 아이는 입을 다문 채,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볼은 새빨갛고, 표정은 삐친 듯 뚱해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그렸을까. 아주 오래 전에 그려진 그림인데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 옆엔 중세 성화를 닮은 그림이 있었다. 붉은 옷의 여인이 한 손엔 막대기를 들고, 다른 손으론 벌거벗은 아이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도망치려는 듯 두 팔을 들고 있었고, 여인의 얼굴에는 단호함과 슬픔이 겹쳐 있었다. 성서인지 신화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두 인물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마치 마리아와 예수를 민속적으로 변주한 듯한 구도. 위엄보다 일상의 감정이 스며 있는 얼굴이 유머스럽게 보였다.

반 고흐의 아이리스 모작도 있었다. 선명한 코발트블루의 꽃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굵은 윤곽선과 강한 색 대비가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치 봄의 폭발처럼. 너무 정교하게 그려져서 진품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살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나는 그날 그림을 사지는 않았지만 많은 얼굴과 풍경을 만났다. 웃고 있는 얼굴, 눈물로 번진 얼굴, 그리고 형체만 겨우 남은 희미한 얼굴들, 시장 바닥에 놓인 그림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이름도, 기교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자유로웠다. 틀에 얽매이지 않은 선과 색은 거침이 없었고, 정제되지 않았기에 더 진실했다. 자신의 방식대로 감정을 열어 그린 그림들이었다.


벼룩시장을 다 돌고 나오는 길, 나는 길을 건너 작은 로컬 마르셰(Marché)로 향했다. 향신료와 허브, 구운 고기와 갓 손질한 채소의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연둣빛부터 자줏빛, 깊은 검정까지—다양한 품종의 올리브들도 은색 쟁반 위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건 씨가 빠져 있었고, 어떤 건 마늘과 허브에 절여져 있었으며, 또 어떤 건 매콤한 고추와 함께 버무려져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여러 가지를 골라 한 봉지 가득 담았다.


숙소에 돌아오는 길, 손에는 검은 봉지 가득 벼룩시장의 흔적이 들려 있었다. 그날 점심은 방브의 기념물로 차려졌다. 테이블엔 이란 상인의 너스레에 넘어가 사 온 바싹하게 구운 바비큐 치킨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믿기 힘들 만큼 촉촉했다. 닭 다리 하나씩 쥐고 조용히 감동했다.


올리브는 한 알 한 알 씹을수록 짭짤하고, 고소했다. 향은 깊었고, 어쩐지 짧은 인생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맛이었다. “왜 이걸 봉지째 안 샀지?” 하는 후회가 테이블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우리는 다음 주에 또 오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그다음 주에 갔을 땐, 올리브 시장이 열리지 않아 허탈하게 돌아서야 했다.


샐러드는 올리브와 민트, 귤과 루꼴라를 얹은 즉흥작이었다. 올리브유와 발사믹이 촉촉이 흐르는 그릇 안에서, 방브 시장의 생기가 다시 피어났다. 올리브 한 알로 웃음이 터지고, 치킨 한 점에 그날 시장의 모습이 입 안에 퍼졌다. 그렇게 우리 식탁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루치의 대화와 풍경, 그리고 ‘맛있는 파리’가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벼룩시장에서 가져온 시간이 묻어난 선물로 한 끼를 지었다. 기억을 요리하고, 여행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숙소의 나무 바닥 위에 오늘의 보물들을 하나씩 펼쳐놓았다. 마치 여행에서 건져 올린 전리품처럼, 색과 이야기를 품은 물건들이었다. 짙은 검정의 스카프는 절제된 우아함을, 와인빛과 보랏빛, 카키색이 어우러진 숄은 이국적인 온기를, 연두색 니트는 부드러운 실로 단단히 짜여 있어, 낡았지만 생기를 띠고 있었다.



가죽 재킷, 찻잔, 오래된 구두, 그리고 이름 없는 가방, 붉은 조개 껍질 목걸이, 나무와 금속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장신구, 큐브 패턴이 살아 있는 반지, 어둠을 삼키듯 반짝이는 블랙 크리스털 반지, 프리다 칼로의 얼굴이 새겨진 독특한 디자인의 반지까지. 낡았지만, 분명 누군가의 손끝에서 오랜 시간 애정을 받으며 견뎌온 것들이었으리라.


대부분 사람들은 여행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지만, 나는 내 몸에 걸치고 다닐 수 있는 물건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파리 방브 벼룩시장에서 데려온 이 전리품들은 오래된 세월과 수많은 인연을 품고 있었다. 이제 그것들은 내 일상에 조용히 스며들며,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언젠가 이 물건들도 시간을 건너, 또 다른 누군가의 애장품이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도 여전히 의미가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배운 셈이다.




#여행의전리품 #방브벼룩시장 #파리플리마켓 #빈티지보물찾기 #유럽골동품여행 #파리여행기록 #시장에서만난시간#시간이묻은물건 #기억을품은사물 #세월의결을걷다 #손끝의기억 #여행의맛 #시장음식 #올리브한입의여행 #기억을요리하다 #방브식탁 #먹는여행 #한끼의풍경 #여행에세이 #파리산책 #감성기록 #에세이스트그램 #문학적인여행 #일요일의기억 #나만의여행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