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머닝을 합시다
“미래가 성큼 오늘이 된 기분입니다.”
1월 1일, 독서모임 단톡방에 올라온 메시지다. 어린 시절 읽었던 강경옥의 만화 『라비헴 폴리스』의 마지막 장면이라면서 이미지도 함께 올라왔다. 남녀 두 주인공이 선상에 앉아 폭죽을 터뜨리며 “2026년이다”라고 말하는 장면.
찾아보니 『라비헴 폴리스』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소프트 SF 만화고, 라비헴은 미래 도시이며, 두 주인공은 경찰이라고 한다. 《르네상스》라는 잡지 이름을 보자마자 《댕기》, 《윙크》 같은 추억의 만화 잡지가 머릿속에 주르륵 떠오른다. 당시 만화가 배경으로 삼았던 2025년은 근 미래고 마지막 장면에서 2026년이 되었으니, 우리는 지금 만화 속 그 미래를 사는 셈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현대에도 통하는, 이른바 모던 클래식으로 평가받는 이 만화는 현재 인터넷 서비스에서도 볼 수 있다.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 또다시 미래를 제시해야 하기에 2025년을 2045년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말이다. 카톡 메시지 하나에 잠시 과거로 추억 여행을 갔다가, 2045년이면 내 나이가 몇인지 그때 또 나는 어떤 미래이자 현재를 살아갈지 미래로도 잠시 날아가본다. 만화 속 미래가 어느덧 오늘이 된 것처럼, 나 역시 혼자만의 방에서 나가 누군가와 연결되는 미래를 준비한다. 도서관 프로그램을 신청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도서관을 꽤 들락거린 편이었지만,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에는 작년에 처음 참여해봤다. 알차고 좋은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많아서 세금이 이렇게만 쓰인다면 아까울 일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와 책에 관해 논하는 프로그램의 강연자는 드물게 열정적이고, 개방적이고, 배려와 환대가 몸에 배어 있어 한눈에 반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도 동네 모임, 로컬 문화에 관심이 많다면서 독서모임을 해보자고 제안하는 모습도 근사했다.
“선생님들, 외롭지 않으세요? 전 외로운데.”
독서모임을 제안하면서, 진담이든 아니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이미 높은 자존감의 증거로 보여서 그 또한 멋졌다. (너무 애정을 고백하나 싶긴 하지만 두어 계절 넘게 그 인상이 변하지 않았으니 이 느낌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꼭 말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굳이 내게 마이크를 쥐여주는 순간이 아니라면, 나는 대체로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말하는 데 썩 재주가 없기도 하고, 눌변이라는 자격지심이 있는 데다, 혹여 실수하지는 않을까 싶은 방어기제도 강해서일 테다. 그래서인지 편안하고 자유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동경하게 된다. 그런 내가 심리적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독서 모임에 참여하겠다고 한 데는 강연자에 대한 호감과 신뢰가 결정적이었다. 여기에 편집자로서의 부채감도 한몫했다. 독서모임에 관한 책을 기획하고 만들면서 ‘연결의 가치’를 말해놓고 정작 나는 숨는다고? 함께 읽기의 즐거움을 팔아놓고 나는 혼자서만 읽는다고? 이건 스스로 생각해도 영 모양이 안 사는 일이었다. 내가 만든 문장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라도 도망치긴 어려웠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낯 모르는 사람들과 굳이 시간을 내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모든 것이 경제원리로 환원되고, 관계에서마저 효율과 성과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느슨한 공동체라니.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후배는 침울하고도 시니컬한 표정으로 “선배, 난 이제 그런 거 안 믿어요”라고 말했다. 아니, 얘. 내가 너하고 뭘 하자는 건 아니잖니? 어쨌거나 공동체라는 건 그것을 한창 말했던 사이에서도 안타깝게도 이제는 화석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 표정은 공동체를 원하고 추구하는 마음이 그만큼 상처받았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서로에게 쓸모를 열렬히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나.
모임에 대단한 목표나 규칙은 없다. 책을 읽고, 돌아가면서 발제를 하고, 각자 마음에 남은 문장을 꺼내놓고, 각자의 관점과 해석을 곁들인다. 누군가의 말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건드리고, 그 기억이 다른 질문과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혼자 읽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과 시선이 테이블 위에 하나씩 놓인다.
작년에 한디디의 『커먼즈란 무엇인가』를 인상 깊게 읽었다. 저자는 시장과 국가라는 거대한 두 축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하며, 그 틈새에서 혹은 그 너머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조직하고 자원을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커먼즈’를 제시한다. 커먼즈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첫째, 토지나 숲, 디지털 지식과 같이 우리가 공유하는 자원이다. 둘째, 그 자원을 함께 관리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인 공동체다. 그리고 셋째, 자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배분하는 규칙과 제도이다. 그리고 커먼즈를 이루고 유지하는 행위와 과정을 커머닝이라고 부른다. 어렵고 거창하게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공동 텃밭 가꾸기,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 공동육아 등이 모두 커머닝이다. 내가 독서모임에서 커머닝의 씨앗을 발견했듯, 저자 역시 ‘친구들과의 책읽기’를 커머닝으로 본다. 더 작게는 가정에서도 커머닝은 얼마든지 이루어진다.
좋아하는 일화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1516년에 출판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는 원고를 늦게 넘기면서 편집자에게 이런 변명을 했다고 해요.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커머닝을 하고 자식들과 담소하며 하인들과 대화를 하기 때문”에 원고가 늦어졌다고요. 아내와 커머닝을 하다니! 당시 커머닝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였던 겁니다. 모어의 말에서 커머닝은 아내와 신체와 정신의 활동들을 섞고 나누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저와 친구들의 책읽기처럼요. ― 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위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유튜브 채널 <인생 녹음 중>과 <재지마인드>를 떠올렸다. 부부이자 친구이자 동료 같은 그들의 티키타카를 엿듣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건 그 대화 역시 커머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의 생각이 섞이고 둘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규칙이 있고, 둘의 관계를 잘 가꿔나가고 싶다는 바람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 들어본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관계의 좋은 합, 최소 공동체의 건강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커머닝이란 서로의 일상에 기분 좋은 참견을 허락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주에 한 번 수요일 저녁, 각자의 집에서 읽어 온 책이 도서관 테이블 위에 놓이고, 누군가의 해석이 다른 사람의 경험과 섞인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문장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얻고, 나 또한 혼자일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나 역시 이 공동체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고르고 보탠다.
우리에게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 때로는 진지하게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 혼자서 머릿속에서 굴리는 생각도 좋지만, 사람들과 대화하며 연결되고 지평을 넓히는 것도 꼭 필요하다. 이런 작은 모임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좋은 대화를 계속해서 쌓아간다면, 2045년쯤에는 우아하고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테이블 위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가 나를 만들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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