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과 불안은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나 역시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산다.
얼마 전 급성 충수염에 걸렸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정답이 보이지 않는 회사 업무, 정돈이 필요한 관계, 자아실현의 부재, 자기 효능감의 출타, 장기적 생존에 대한 전망 등으로 그 전날도 잠을 편안하게 못 잤고, 그날 당일도 마음이 힘들었다.
하지만 충수염으로 인한 격심한 복통이 시작되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면서부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 닥친 육체적 고통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걱정 같은 걸 할 새가 없었다. 응급실까지 기어가서 검사를 받고 수술을 한 후 입원실에서 다시 눈을 뜰 때까지 한순간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마취가 풀린 고통으로 끙끙대다 소등하고 잠을 잘 시간이 되어서야 지금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취가 풀린 수술 부위는 아프고, 병원 침대는 좁고 딱딱하고, 금식을 오래 해서 배도 고프고, 다인실이라 시끄러워 도저히 잠을 잘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적어도 충수염이 완치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회사 일도, 자아실현도, 먹고사는 문제도, 사회적 관계들도 퇴원할 때까지는 손댈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는 물리적 사실이 모든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게 했다. 그동안 매일매일 시달려왔던 장기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면서도 마음이 가벼웠다. 적어도 당분간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라는 생각이 마음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 며칠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부인의 시선이 없고, 씻는 것도,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자유인 내 일상의 영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꺼 두었던 장기적 문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의 스위치가 켜졌다. 집에 돌아오는 순간 바로 탁 켜지는 그 감각을 느끼면서 아니 어떻게 설계했길래 이토록 조건에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연차를 내고 집에서 요양 중이다. 육체의 고통은 거의 사라졌고 그에 비례하여 걱정과 불안의 수위는 다시 넉넉하게 차올랐다. 걱정과 불안이 없었던 입원 기간 동안의 평안한 감각이 아직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몸은 아팠지만 덕분에 진정한 정신적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몸이 이 정도로 아파서 일정한 기간 시간이 동결될 정도가 되어야 걱정과 불안의 스위치를 다 끄고 쉴 수 있다니. 휴식 진입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세상에 내 마음처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