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친한 타인이 필요하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서 서로 안전한 간격을 유지하는 사이가 아닌. 남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가면을 벗은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나만의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을 찾는 일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우연의 확률을 뚫고 마음의 결이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운좋게 만난다 해도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이 몹시도 힘이 든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의 상자를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각난 가족관계, 어긋난 성장 과정, 떳떳하지 못한 사고관, 깊이 새겨진 상처, 수치스러운 콤플렉스 등 상자 안의 내용물은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다. 내 상자를 하나씩 여는 것도 두렵지만 상대방의 상자 속을 확인하는 것 또한 무서운 일이다. 큰 마음을 먹고 상자를 열었는데 상대방이 거부하거나 내가 거부해서 관계가 깨지면 그런 사건은 평생의 흉터로 남는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진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무서운 과정이다. 그래서 많은 어른들이 서로 안전한 간격을 지키며 사람을 사귄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고 실패와 상처의 경험이 쌓일수록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마음의 상자를 여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다 이윽고 상자를 여는 방법을 잊어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쯤에 이르면 다 포기하고 그냥 평생 이대로 살까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친한 타인이 없는 세상은 바싹 마른 모래만 휘날리는 삭막한 사막과 같다.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나를 특별하게 여겨주는 것도 없이 모든 것이 공평하게 멀고 무의미한 세상이다. 이런 삶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무척 고통스럽다.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 조용한 지옥이다.
마음의 상자를 여는 일은 힘들고 두렵지만 이런 황폐한 삶을 견디는 것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한 일이다. 무섭고 주저 되어도 마음의 상자를 여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은 견딜 수 없지만 그 사막에 작은 선인장 하나만 있어도 사막을 숲으로 여기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