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끼 Oct 30. 2021

잠시 멈춘다고 큰일 나지 않아

퇴사한 나에게 하는 자기 암시


퇴사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하고 나니 별 것 아닌 퇴사 후 한 달이 지났다. 총 3개 회사에서 각각 1년, 1년, 스타트업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20대가 끝났다. 퇴사도 이쯤 되니까 익숙해지는 느낌. 다만 이전과 다른 건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쉼을 작정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회사를 나오는 결정은 쉬웠는데 그 후 쉬겠다고 정하는 게 어려웠다. 몇 달간은 퇴직금과 내일채움공제 환급금이 도와주겠지만, 소비를 줄이면서 지내면 되겠지만, 그리고 옆에 버는 사람이 있으니까 더더욱이나 걱정이 없겠지만, 해외여행을 갈 것도 아니고. 다 알면서도 주변에 '나 쉰다'라고 얘기하고 지내는 걸 나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스스로를 옭아매는 성격이라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을까 봐서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해야겠다는 직감이 계속 들었다. 이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직감. 이대로 지속하다가는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의 내 모습에서 더 뻗쳐서 그 밖의 내 일상까지도 싫어질 것만 같았다. 퇴사 전 몇 달은 어떤 마음으로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로 거의 매일매일 속으로든 밖으로든 울었던 것 같다.


 퇴사 직전 매출 실적은 역대 최고치였고 연말이면 연봉협상도 있겠다, 그만두지 않을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과와는 별개로 내가 담당하고 있는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사랑하니까 이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지만, 처음에 브랜드를 설계할 때 내가 바라보던 방향과 지금의 방향이 너무나도 달라져서 그걸 스스로 인정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내 브랜드가 아니니 회사가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게 당연히 맞지만 그 브랜드에 대한 오너쉽만큼은 과몰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너무나 진심이었으니까. 유명하진 않아도 '이거 제가 했어요'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브랜드였으면 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나를 소개할 일이 있어 간단한 자기소개를 쓰려는데 소속을 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에는 '이거 심각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퇴사 통보 후 한 달은 물 흐르듯 지나갔다. 가을이면 몇 개씩 열리는 콘퍼런스 직전이라 준비할 것도 많았고 진행하던 팀 프로젝트도 막바지였기 때문에 정신 빼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다행이었다. 퇴사 면담도 인사팀 팀장님과 친한 인사담당자님이랑 한 것 외에는 묻는 사람도 따로 없어서 여기저기 불려 갈 걱정에 불안에 떨었던 게 바보 같을 정도로 평온했다. 나 말고도 최근에 퇴사한 사람만 여러 명이라, 조용히 떠나고 싶어서 같은 팀 외에는 크게 알리지도 않았다. 뭐 좋은 일이라고! 






멈추니까 과거의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두고 나서 꿈에 자꾸 회사 사람들이 나왔다. 꿈을 꾸는 건 뇌가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벌써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 장기 기억으로 바뀌어가는 걸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그마저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와 조직이 물리적으로, 심적으로 멀어지니 자연스럽게 나는 스스로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그만두면서 유일하게 정했던 목표인 '스스로의 내면에 집중하기'를 매일 깊게 실행해나갔다. 나라는 사람이 뭘 좋아하고, 뭘 해왔는지를 되짚어보는 게 그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을 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평생 디자이너일 줄만 알았다. 할 줄 아는 게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하는 것뿐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내가 좋아하는 건 디자인을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디자인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획을 하는 일이었다. 전공 수업 중에도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직접 기획할 때 가장 재미있었고, 전공 수업보다는 인문교양 수업이나 부전공으로 택했던 미술사학 수업을 들을 때가 훨씬 흥미로웠다.


 졸업 시즌이 다가오고 동기들이 디자인 스튜디오나 대기업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취업해 갈 때쯤 나는 대학생 대외활동으로 인턴 기회를 얻어 잠시 일했던 곳의 마케팅팀에 지원했다. 아쉽게도 합격은 못 했지만 마케팅 필드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실현하고자 했던 첫 번째 시도였다. 그 후 첫 커리어는 소기업에서 시작했다. 취업하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잠시 일하던 회사였는데 주로 업무 제휴 제안서나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일에 일손이 살짝 부족했다. '여기서 일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다 내가 먼저 입사를 제안했다. 내게 할당된 업무도, 역할도 따로 준 적 없었지만 상사의 몇 마디 칭찬으로 '이 회사에는 내가 필요하다!'라는 당돌한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그럼에도 운이 좋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인 나를 받아 주셨다. 정작 했던 업무는 블로그 운영이나 상세페이지 수정, 그 외 디자인을 포함한 잡다한 업무들이었지만 '마케터'라는 자각 없이 일했던 것 치고는 관련 실무를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제법 착실하게 나아갔던 것 같다.


 첫 회사에서 1년 남짓을 보내고 퇴사한 시점에 평소 알고 지내던 분께 제안이 왔다.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서 브랜드 에이전시를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처음 다녔던 곳은 직원이 20여 명 남짓이라 작다 여겼는데 이 회사는 나까지 포함하면 7명이라 더 적었다. 소기업 이후에 또 소기업에 가도 괜찮을지 마음에 걸렸지만 거의 창립 멤버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일할 수 있다면 배우는 점도 많고 더 보람될 것 같았다. 내게 제안을 주신 대표님을 포함해 같이 일하게 될 분들이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었던 것도 한 몫했다.


 이곳에서의 일은 기대했던 대로 배울 점이 매우 많았다. 상품 기획부터 브랜드 컨셉, 채널 운영, 콘텐츠 제작까지 상품을 판매하는데 필요한 일의 대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 디자인 업무를 주요하게 하긴 했지만 브랜드 컨셉을 만들고 정하는 데에는 팀원들 모두가 너 나할 것 없이 머리를 싸매고 다 같이 산출물을 만들었다. 여기서 일했던 것들이 내 업무 방식을 거의 정의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이곳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걸 가져다주었다. 내가 나올 때쯤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서 1년이라는 기간만 함께하고 아쉽게도 이별해야 했지만, 같이 일했던 분들과는 아직도 좋은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에는 내 것을 하고 싶다는 깨달음


너도 메인 댄서 하고 싶지? -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 내가 정확하게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스타트업에서 2년 동안 마케터로 일하느라 디자인 업무랑은 거리가 생겼지만 디자인도 여전히 좋아하는 일임에는 틀림없고, 마케팅 업무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스스로는 둘 다 깊이 있게 해낼 자신이 있다 생각하지만 회사는 사람을 그렇게 뽑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이력서를 정리한다면 아마 이도 저도 아닌 전문성 없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쉬면서 알아낸 것은 그게 나라는 것. 때로는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고, 마케팅을 하고 브랜딩을 하는 사람! 어떤 일로 돈을 벌 건지 결정하기 전에,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건 인정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하나 더 깨달은 게 있다. 회사를 여러 군데 옮기면서도 '언젠가는 내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쭉 해왔다는 것. 일을 했던 몇 년간 나의 많은 면이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은 건 스스로의 힘으로 비즈니스를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직장인 대표 허언이 '퇴사하면 유튜브 할 거야.'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퇴사를 결심하는 직장인들도, 이후 자신의 것을 하길 원하는 사람도 많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나를 좀 더 믿어주고 싶었던 건 어딜 가나 진심으로 일한다는 평을 들었을 때였다.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내 브랜드인 것처럼 진심을 다해왔던 시간들을 누군가가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었던 경험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해 주었다. 내 것을 하지 않을 때도 그렇게나 진심일진대, 하물며 내 걸 한다면 어떨까. 이번에 처음으로 '조직 밖의 나'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상상해볼 수 있었다.


 이제 갈 길만 정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복잡한 감정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케터 융님의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을 접했다. '자발적 방황'을 응원하는 책답게 조직 밖의 다양한 삶을 직접 눈으로 본 작가님의 살아있는 경험담들이 녹아있는 책이었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심지어 그 길에서 먼저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니! 너무 안심이 되고 위로를 받았다. 그저 앞에 놓인 길을 나아가기보다는 그 길을 가는 스스로에게 더 집중하는 여행 에세이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한 달 동안 나에게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해서 그만뒀는데, 한 달 내내 내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를 다그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냥 재미로 시작했던 블로그도 가볍게 쓰기보다는 의무감에 포스팅을 할 정도로, 무언가 잡히는 게 없으면 어쩔 줄 모르던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생산적인' 휴식을 위해 독서에 집착하고, 글 쓰는 것에 집착하고, 새로 산 아이패드로 뭘 그려야 하나 고민하고. 어떻게 보면 회사에 다닐 때보다도 내 손은 더 바빴다. 


"나에게 성공적인 인생이란, 가장 즐겁고 행복한 버전의 나를 찾고, 그 모습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 퇴사는 여행, 정혜윤 


 하지만 다시 멈춰서 과정 자체를 즐기기 위해 나에게 더 관대한 내가 되기로 했다. '퇴사는 여행'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더 음미해보면 좋겠다. 융님이 말하는 '가장 즐겁고 행복한 버전의 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이번 휴식기가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에 용기 있게, 그리고 여유롭게 뛰어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나를 위해서.

작가의 이전글 용과 주근깨 공주, 아름다운 메타버스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