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가 이어준 어떤 안부
터키는 우리 가족의 첫 번째 고양이다. 지인이 길에서 데려온 새끼 고양이를 도저히 키우지 못하겠다고 하여 우리집에 오게 되었다. 세계가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 내 삶에 몇 차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출산이고, 다른 하나는 고양이 터키와 같이 살게 된 것이다. 두 순간은 도망갈 수 없는 꽤 무거운 책임을 내게 주었고, 기쁨과 슬픔, 좌절 같은 감정뿐 아니라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다양한 지식과 깨달음도 주었다.
남편이 터키를 데려올 때 이동장이 아닌 이마트 쇼핑백에 담아 올 정도로 당시 우리 가족은 반려동물에 대해 무지했다. 낮에 결정하고 당장 저녁에 집에 오게 된 고양이로 정신없이 모래와 사료, 화장실 등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는 주로 인터넷 검색과 ‘고양이라서 다행이야’라는 네이버 카페를 통해 익명의 집사들이 쌓아온 다양한 노하우와 고양이 습성에 대한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다.
터키는 흰색, 검은색, 노란색이 섞인 삼색 고양이였는데, 삼색 고양이는 암컷만 있다는 사실도 그 카페에서 알게 되었다. ‘고다’ 카페가 아니었다면 고양이 스크래처나 장난감을 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엄친아처럼 다른 집 고양이들의 사진과 행태들을 보며 우리집 고양이만의 개성도 알게 되었다.
우리와 살기 전 길에서 보낸 4-5개월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터키는 겁이 꽤 많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고양이들처럼 사람에게 친근한 무릎냥이도 아니고, 쓰다듬는다고 골골송을 부르는 것도 아닌, 꾹꾹이도 거의 하지 않는 고양이었다. 로얄 캐닌 건식 사료만 고집할 뿐 간식은 일절 먹지 않아 우리를 조금 심드렁하게 만들기도 했다. 인간에게 귀여움을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다는 애티튜드였지만, 같이 산지 며칠도 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존재만으로도 터키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터키가 우리집 일원으로의 소속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집에 가까이 오면 항상 어딘가로 숨어버려, 우리 부부는 택배가 도착한 것을 나가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를 옮기고, 쓰다듬어 주면 짐짓 참아주는 표정의 터키지만 잠을 잘 때는 항상 우리와 한 방에서 자고 싶어 하고, 퇴근해 집에 도착하면 이미 현관 앞에 기지개를 켜며 마중 나와 있었다.
터키와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동물이 주는 다정함의 보온을 누리기엔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터키와 늘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극성과 애착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 온 세상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듯, 터키를 키우며 길 위의 동물들에 대한 연민도 매년 늘어만 갔다.
”올해는 너무 추워져서 길고양이들이 걱정이야“
“비가 계속 내리네. 어려 보이던데, 그 고양이들도 어딘가 잘 피해 있겠지.”
“이 가뭄에 캣맘들이 있어 다행이야, 물 먹기도 쉽지 않을 텐데…”
추운 날에는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고, 날이 더우면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을 찾아 늘어져 지내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동물들도 인간처럼 날씨에 취약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기후 변화로 점점 폭염이 길어지는 여름에는 사람이 출근하고 집에 혼자 남는 고양이조차도 걱정이 들 지경이다. 그 마음이 길 위에 길냥이, 유기견은 물론이고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로 푹푹 찌는 축사에서 지내는 가축들의 고통까지 가 닿게 되었다.
우리집 고양이를 보살피며 생긴 연민이 이어져 동물단체, 동물권 활동가의 SNS 계정들을 다수 팔로우하기도 했다.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곰, 동물 실험용 토끼와 비글의 사연, 산채로 깃털을 뽑히는 거위, 인간이 쳐둔 울타리 때문에 폭설에 속수무책 갇혀 죽고만 산양들의 사연들을 출퇴근길 읽으며 종종 울곤 했다. 이 앎은 내 마음을 무겁고 자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걸 덜어내기 위해 관련 모금이나 후원에 참여하고, 고기를 덜 먹고, 동네 캣맘에게 사료와 간식을 나누면서도, 더 과격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종종거림이 생겼다. 터키를 키우며 나는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에게 매우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아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 양심에 떳떳하지 않은 사람 말이다. 얼마 전 나는 SNS를 통해 새우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새우의 눈 뒷부분에는 적절하지 않은 환경에선 알을 낳지 않도록 막는 번식 억제 호르몬이 나오는 분비선이 있다. 이 부분을 잘라냄으로써 새우가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번식을 꺼리지 않고 더 빠른 번식을 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다.“_<동물학대·생태계 파괴 논란 일어나는 새우 양식(펭귄뉴스, 곽은영 기자, 24.11.21)>
눈을 잘라내면 다른 감각에도 영향이 생기고 고통을 느껴 새우는 잘린 부위를 자주 비벼댄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기사를 읽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새우를 먹는다. 하지만 그런 내가 부끄럽다. 어쩌면 터키와 함께 산 16년 동안, 터키는 나를 동물원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동물권을 아는 사람으로, 지구 위 동물들의 안녕을 살피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끼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셈이다.
터키는 창문을 열어주면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위로 올려 킁킁대며 바람과 냄새를 음미하곤 했다. 볕이 내리쬐는 곳에 있기를 좋아하고, 여러 개의 종이 스크래처 중에서도 고집하는 취향이 있다. 노끈 잡는 놀이를 좋아해서 얼굴 앞에 가는 노끈을 드리우면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발을 허공에 움직이곤 했다. 가족 중에도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어 늘 그 사람 곁에서 머물곤 했다. 그렇게 우리와 16년을 산 터키는 지난 10월 고양이별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