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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소소 산문(2)

by 정연주

살아있는 마음에는 미움과 증오, 고통이 자란다. 이걸 잊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레이스 초반에는 마음을 잠식하는 여러 키워드가 떠오르지만 20분쯤 달리다 보면 몸이 마음을 압도한다. 조직원의 불평이나 친구에게 준 상처, 상사로부터의 인정이나 남편에 대한 사소한 불만들이 대수롭지 않아 진다. 계속 달려야 하고, 심장은 벅차고, 허벅지는 팽창한다. 그렇게 20분을 더 달리면 재시동되고, 캐시나 쿠키 같던 오래된 마음들도 해소된다.


주말 아침에는 중랑천을 달린다. 5km 정도를 달리며 새들이 발을 무릎까지 담그고, 물고기들이 수면 위에서 뻐끔거리는 것을 구경한다. 5월의 장미들이 11월에도 아랑곳없이 피어 있고 코스모스, 접시꽃 같은 제철 꽃들까지 가세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천 건너편의 풍광이 좋아 보일 때는 겸재교를 통해 건너가 그곳을 달린다. 건너편 중랑천에는 마을 텃밭이 있다. 번호표를 단 푯말 뒤로 가지와 고추, 방울토마토가 자란다.


빠르게 달린 후에는 물가에 가까이 다가가 걷는데, 이런 에너지와는 달리 파헤쳐지고 마른풀들이 가득하다. 그 밑으로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된 것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다. 한눈에도 유한젠 섬유유연제이고 보름달빵 포장재이며 톰포드 오드우드 향수병. 이곳과는 카테고리가 전혀 겹쳐지지 않는 키보드와 마우스 같은 것들 말이다. 괜히 마음이 씁쓸해져 고개를 돌리면 하천도 바닥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구간에서는 흐물흐물해져 버린 플라스틱, 나뭇가지, 참치캔 같은 온갖 쓰레기들이 한데 모여 쓸릴 듯 말 듯 위태롭게 걸려 있다.


한 때 내가 가졌지만 몰래 버리고 온 것들이 떠올랐다. 지하철역 선반에 두고 온 폐가전, 공원 벤치에 마시다 만 테이크아웃 커피, 회사 쓰레기통에 버린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 영향력 있는 유부남 상사를 좋아하던 마음. 기회를 얻기 위해 동료를 험담했던 순간, 잘못되었다고 여겼지만 나서지 않는 비겁함 같은 것들은 애써 버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했는데, 마음 바닥에서 드문드문 걸려 떠오르게 하는 기억들이기도 했다.


며칠 전 중랑천으로 달리기에 나섰다가 내가 발견한 것은 벌어진 기내용 캐리어다. 닫혀 있었다면 온갖 생각이 들었겠지만, 누군가가 이미 열어본 것인지 다행히 열려 있었다. 다른 건 없이 때 묻은 분홍색의 피글렛 인형이 있었다. 인형은 세제통과는 달라서 마음이 저릿했다. 이 피글렛은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가까운 친구의 피글렛 인형 이름은 ‘모찌’다. 모찌는 친구와 여행을 함께 하며 한동안 인스타그램 계정에 셀피로 기록되곤 했다. 빛났던 순간을 기억해. 언젠가 흐릿해질 테니까. 언젠가 쓸려가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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