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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끝은 있으니까

by 또랭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이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엄마, 사람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애가 사회성이 떨어지나, 덜컥 겁이난 나는 왜 그런 걸 묻냐고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고 배웠는데, 오히려 자기 멋대로 하는 애들이 더 편하게 사는 것 같아. 항상 양보하는 애들만 하잖아. 진짜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벌 맞는 거 맞아?“ 꽤 예리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짐짓 침착한 척 대답했다. “착한 일을 한다고 바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야. 반대로 나쁜 일을 한다고 해서 바로 벌을 받지도 않아. 하지만 쌓이고 쌓여 더 크게 돌아와. 그니까, 지금은 모르는 거야.“ 아이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진짜 돌아오는 게 맞냐고 계속 물었다. 나는 ‘엄마가 보장할게.’라고 큰 소리를 뻥뻥 치며 공수표를 날렸지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까진 숨기지는 못했다.


착한 끝이 정말 있을까. 동화책에서도, 부모님께도, 선생님께도 언제나 듣는 이야기지만 ‘나쁜 놈이 더 잘 먹고 잘 살더라’라는 얘기 역시 심심치 않게 듣는다. 특히나 한 명이라도 남을 밟고 일어서야 더 좋은 대학에,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다고 믿는 ’대한민국‘에서 배려와 양보를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명분이 좀 부족하다. 그래서일까. 옛날에는 모두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만, 지금은 학교 들어가기 전 엄마들이 ’싫어‘ ’하지마‘하는 거절의 말들을 더 가르친다. 물론 이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한 거절을 배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렇지만 확실히 옛날처럼 ‘다같이 두루두루 잘 지내’보다 부당한 요구에는 확실히 거절하되, 배려와 양보를 곁들여야 한다를 가르치는 것은 부모에게 꽤나 어려운 레벨이다.


애초에 ‘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양보하고 나눠주고, 배려하는 것. 혹은 그 이상까지 내어줘야 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알지만 호구까진 되고 싶지 않다. 내 기준에선 이 정도면 선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눈엔 부족할지도 모른다. 배려를 한다면 몇 번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에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헷갈리는 것들 투성이이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확실한 한 가지는 ‘먼저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상대가 누구든, 먼저 배려하고 베풀되, 그것을 못 받는 사람, 적다고 불만인 사람,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은 나중에 걸러내면 된다. 겪어 보니 호구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 역시 ’배려‘와 ’선의‘의 멱살을 내가 잡고 이끄는 것이다. 상대방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오는 배려는 알맹이도 없고, 멋도 안 난다. 사람들은 ’베풂‘과 ‘선의’를 허약하고 피동적인 단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 힘이 센 단어들이다. 세상은 먼저 선의를 베풀고 무언가를 나눠주고자 했던 사람들로 인해 발전했고, 그러한 제품과 서비스로 가득 차 있다. 결국 돈과 사람들의 인정 역시 이러한 배려와 선의에 대한 대가이다. 그러니 나는 착한 끝은 있다고, 이 연사 강력하게 외치는 바이다.



다행히 아이도 나의 말을 이해했는지, ‘배려’가 무조건 내 것을 나눠주고, 뺏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아이는 ‘배려’를 일종의 인생 ‘마일리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뭐, 그건 그거 나름대로 맞는 말 같아서 수긍했다.

얼마 전 아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학교에서 돌아왔다. “엄마, 엄마 말이 맞았어. 오늘 남아서 선생님 도와준 애들한테만 선생님이 젤리를 주셨어!“ 기껏 젤리이지만 아이는 그렇게 작은 ‘착한 끝’ 하나를 경험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들이 모여 ‘배려’와 ‘선의’를 멱살 잡고 하드캐리하는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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