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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Dec 03. 2023

독감 바이러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음 거리 좁혀주는 다정함에 관하여

낮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휴대폰에는 이런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승호 엄마, 문 앞에 뭐 두고 가요.

은호, 승호 얼른 나아라 :)



아이들 점심밥을 차려주고, 먹고 치우는 동안에도 확인하지 못했는지 메시지는 세 시간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곧장 현관문을 열어보니 발 앞에 하얀 종이 가방이 보였다. 옆 동에 살고 있는, 이웃 언니가 놓고 간 것이었다. 가방 안에는 내 주먹보다 큰 사과 여섯 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떡소떡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뜻밖의 깜짝 선물에, 아이들 얼른 나으라는 메시지 속 주문에 몸과 마음에 불끈, 힘이 났다. 무엇보다 나를 웃게 만든 것은 그녀의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11월의 끄트머리, 아이들이 독감으로 아팠다. 병원에서 수액 주사를 맞고서야 두 아이 모두 열이 내리고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염성과 증상이 심한 A형 독감이었다. 아이들은 며칠간 집 안에서 격리 상태로 지내야 했다.



작은 아이가 등교하지 못한 첫날, 이웃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주절주절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주말 아침부터 큰 아이가 40도 넘는 고열을 앓던 얘기, 다음 날 작은 아이가 똑같이 열이 오른 얘기, 타미플루를 먹는 대신 페라미플루라는 독감 수액 주사를 맞은 얘기... 나처럼 아들 둘을 낳아 키우는 언니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언니는 "아이고", "세상에!", "휴." 함께 탄식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는 '오늘은 누굴 행복하게 해 줄까' 연구하는 사람처럼 타인에게 다정하다. 다정한 사람은 분명 부지런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다고 불러내어 다짜고짜 커피를 사주고, 한 번은 우리 집 우편물함에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넣어두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무 날도 아님에도 초인종을 누르고, 꽃다발 한아름 안겨주고는 돌아가기도 했다. 꽃을 많이 사서 나눠주고 싶다고. 한 겨울에 받았던 그 꽃은 빈 가지 같던 마음을 얼마나 풍성하게 채워줬는지.



사실 아이들이 아픈 걸 보면서도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끼니마다 뜨끈한 국을 먹게 하고, 차가운 것들 멀리하게 잔소리하며, 따뜻한 보리차가 끊이지 않도록 리필해 주는 정도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 등교가 삼일 연속 미뤄지니 나도 소진이 되어 몸이 늘어졌다. 무엇보다 마음 틈새로 자꾸만 살바람이 새어들었다. 그동안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한 게 맞을까. 아이들이 이젠 많이 컸다고 스리슬쩍 맛보았던 육아의 해방감, 먹이고 돌보는 일에 어느 순간 설렁설렁해진 태도, 나에게 몰두하기도 바쁘다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이 아프면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죄책감. 그것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찰나, 이웃 언니의 안부 전화와 선물은 분연히 마음을 일으켜 세워줄 만한 응원이었다. 잘하고 있다고. 그러니 며칠 정도는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 그대로 걸으면 된다고.



사과를 보니 힘이 나요!

사과 맛나요. 사과 보고 승호 엄마 생각났어요.  



가끔씩 그녀와 마트에서 장을 함께 본 일이 있었다. 작은 아이들이 태권도 학원을 함께 다니고, 서로 옆동이니 우린 동선이 참 비슷하다. 마트에 가면 사과를 자주 사던 내 모습을 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과를 어떻게 그렇게 좋아할 수 있냐고 신기한 듯 물었던 언니를 나 또한 기억한다. 받은 사과를 씻어 반을 쪼갰다. 사과 씨 주변으로 노랗고 투명한 빛깔의 꿀이 박혀 있었다.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그 아삭하고 시원한 맛이란. 365일, 매일같이 먹었던 그 어떤 사과보다도 달디달고, 깊은 갈증을 해갈해 주는 맛이었다.   



독감은 참 강했다. 아이들은 꼬박 5일간, 집 안에만 머물고 나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얼마나 지독하면 이름부터 '독감'일까. 남에게 주는 것 하나 없이 자기 배만 불리던 스크루지 영감처럼 고약하다. 하지만 독감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상하게, 약하게 만들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씨앗 하나 심기지 않았을까.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 그래서 이전보다 더 가까이, 상대를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 그런 다정한 마음이 내 안에 새로운 뿌리를 내렸으리라. 이웃 언니에게서 내게로 온 그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의 쓰러진 마음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도록. 겨울의 문턱을 힘겹게 넘으며 삶을, 사랑을  가지 더 배운다. 서로를 돌아보는 다정함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 거리를 좁혀준다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있는 그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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