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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Jun 29. 2024

순삭, 초당옥수수의 맛

해가 길어진 요즘 하루에 한두 번은 장을 보러 나간다. 커가는 아이들의 먹는 속도와 기호를 맞추려니 장 보는 일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철마다 바뀌는 과일 구경만큼은 여전히 즐겁다. 내가 나에게 너무 몰두하고 있다고 느껴질  일부러 과일 가게나 마트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일상을 멀리 벗어나지 않고도 마음의 환기가 가능해지는 이 작은 출구를 나는 사랑한다.  



여름에는 애써 조리하지 않아도 식구들에게 바로 내어줄 수 있는 과일류가 많이 나와 좋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의 색이 바뀌자 과일 진열대 위도 알록달록 다채롭다. 그래도 이것저것 다 살 수는 없으니 한동안은 새로 나온 과일을 한 종류씩 사다 먹는 재미를 누렸다. 향이 진한 신비 복숭아는 한 입 베어무니 여름이 퍼져 나왔고 처음 본 망고 수박은 노란 설탕을 먹는 것 같았다. 애플 수박이란 것은 얇은 껍질을 깎아먹을 수 있어서 세상 간편했고. 여름이 시작되며 나온 과일 열매들이지만 내내 봄의 품 안에서 영글었을 터. 매일의 햇빛과 비바람 앞에서 야무지게 버텨낸 얼굴들이 기특하다. 또한 이것들 정성껏 키운 이의 손길을 떠올리면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도 한 꺼풀 벗겨져 부드러워지곤 한다.



하루는 마트에 들어갔다가 이전 날엔 보이지 않던 옥수수자루가 눈에 띄었다. 이맘때 보이는 초록색 그물망 옥수수는 왜 유독 반가울까. 어릴 때 살던 동네가 스무 살 무렵 재개발되기 전까지, 우리 밭에서 나온 농작물 중 가장 좋아하던 것이 옥수수였다. 할아버지가 심으셨던 품종은 노랗고 찰기가 없는 옥수수였는데 달아서 어린아이의 입맛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다만, 시기에 따라 맛의 편차가 컸는데 장마 전 초여름 옥수수가 제일 맛있었다.  



여름방학 무렵이면 다 자란 옥수수나무 사이를 바삐 오갔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갓 영글어 풋내 나던 옥수수 냄새, 맨살에 까슬까슬하게 닿던 잎사귀, 잘 여문 옥수수와 그렇지 못한 옥수수를 찾았을 때 느낀 기쁨과 실망 같은 것들. 옥수수로 가득했던 그리운 정글은 이제 아무리 기억을 늘려봐도 1초 이상 연속 재생되지 않는다. 밭의 주인이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지금 그 곳은 아파트 단지로 바뀐지 오래다. 사진이라도 남겼다면 좋았을 텐데. 대신 제철 먹거리를 맞아들이며 바랜 기억의 해상도를 잠깐이나마 높여본다.



그런데 옥수수의 이름표를 보니 '제주 초당옥수수'였다. 초당옥수수가 제주도에서 나왔다는 건데 얼핏 이해되지 않았다. 초당옥수수라면 덮어놓고 강원도에서 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강릉 '초당두부'가 있으니 말이다. 검색해 보니 결론적으로 초당옥수수는 초당두부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초당옥수수의 영어 이름은 super sweet corn. 옥수수 앞에 붙은 '초당'은 지명 이름이 아닌 당분이 월등히 높다는 뜻이었다. 날 것으로 먹어도 된다는 초당옥수수. 작년인가 생으로 맛보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제주라니, 멀리서 올라온 여름을 한 자루 집어 들고 마트 밖을 나섰다.



싱크대에 서서 옥수수를 먹기 좋게 다듬었다. 겉껍질은 훌렁훌렁 벗기고 심지 부분은 툭 분지르고. 냄비 안에 옥수수를 가지런히 담고 살짝 잠길만큼만 물을 넣어 삶았다. 습관적으로 내가 옥수수를 익히던 방식인데 사실 초당옥수수는 삶지 않고 찌는 편이 더 맛있다 한다.



하교한 아이들과 옥수수를 나누어 먹었다. 설탕 같은 감미료 없이도 어쩜 이리 달 수 있을까! 아삭아삭한 식감은 여전히 낯설다, 낯설다... 하면서 먹다 보니 옥수수를 순삭하고 말았다. 다음에는 날것으로 옥수수 샐러드를 만들어볼까. 모양은 채소인데 맛은 과일에 가까우니 매력적이네. 하면서 초당옥수수에 새 정이 들어간다. 몇 번 쪄서 식구들 둘러앉아 나눠 먹고 나면 올해 무더위도 거뜬히 버티겠지. 여름의 시작이 달고 아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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