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처럼 지나, 다시 봄
양평, 고모의 집에서
지난 토요일은 양평에서 보냈다. 양평은 올여름에 진행될 성경학교 장소 답사를 위해 간 것인데, 먼 길 찾아간 김에 숙소를 잡아 하루 묵게 되었다. 답사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아이들과 올해 첫 물놀이를 하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는 느슨해진 마음과 걸음으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양평에는 우리 고모가 살고 계시지. 여러 일정들을 신경 쓰느라 고모에게 연락드려야겠다는 마음을 계속 미루고만 있었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선 고모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내겐 네 명의 고모가 계시다. 아버지의 바로 아랫 동생인 고모가 지난겨울, 양평에 새 보금자리를 만드셨다. 한국에 돌아오신 게 거의 30년 만인가. 고모가 초등학생 두 아이를 데리고 오스트리아로 떠난 날, 나는 무척 슬펐던 기억이 난다. 친동생처럼 자주 왕래하며 지내던 사촌들과 갑자기 헤어지는 것도 서운했고 낯선 외국 땅에서 고모는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되었다. 고모네가 이국생활을 경험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살기 위해서' 떠나야만 한다는 걸 어린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공항에서 헤어질 때 고모가 그렇게 울더란 얘기가 엄마를 통해 들려왔을 땐 나 역시 함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방이 어둑해진 늦은 저녁, 양평에 있다는 내 연락에 고모는 곧장 답신을 보내셨다. 괜찮으면 왔다갈 수 있겠냐고. 고모가 한국에 오신 후 사촌동생 결혼식과 아버지 생신 때 얼굴을 뵈었다. 하지만 살고 계신 집에는 가보지 못했다. 머리로는 숙소에 들어가 쉬어야 할 시점이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한달음에 달려가 고모를 만나고 싶었다. 다음 날이면 아침 일찍 양평을 떠나야 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우리 가족이 머물던 곳에서 고모 집까지는 고작 15분 거리. 지금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급작스런 조카네 방문에 고모는 아파트 주차장까지 내려와 기다리고 계셨다. 밤이었지만 손을 크게 흔들며 우릴 맞이하는 고모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고모. 오뚝한 콧날까지 할아버지를 똑 닮은 고모. 사촌들이 어릴 때에도 우리 자매를 몽땅 데려간 주말, 좁은 부엌에서 집밥을 해주었던 고모. 그리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은 까먹지 않으신다는 고모.
엄마가 나를 낳은 날, 바빴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병원까지 동행해 준 분이 고모였다. 그러니까 고모는 세상에 막 태어난 나를 분만실 밖에서 첫 번째로 맞이해 준 가족.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널 가장 먼저 봤던 거 알아? 얼마나 똘똘하게 보였는지. 신생아 같지 않았다니까. 그래서 네 생일은 내 머릿속에 딱 박혀있다! 고모가 이 말을 해줄 때마다 나는 의기양양, 관심이라는 빛으로 충만해지는 아이가 되었다.
고모의 집은 역 근처 신축 아파트였는데 신혼부부 살림집처럼 새 가구 냄새가 났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공간들을 보니 왠지 설레었다. 가장 눈에 띈 곳은 거실. 작은 아뜰리에 같기도 했다. 창가 옆에는 이젤이 놓여 있었는데 입을 크게 벌린 채 웃고 있는 여자아이 그림이 보였다. 벽걸이 티브이 아래에도 잎이 무성한 나무 그림, 성인이 된 사촌 동생 얼굴 그림이 놓여 있었고. 모두 고모가 최근에 그린 연필 스케치였다. 캔버스에 그려진 화려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수수하고 따뜻하며 사랑이 담긴 그림들이었다.
“너네 온다고 어질러놓은 거 열심히 치웠네! 하하. 혼자 있으니까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그림 그리다가 시계를 보면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는 거야.”
그야말로 고모는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지내고 계셨다. 60대 후반의 고모는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미술을 얼마 전부터 시작한다고, 한 달에 만원씩 내고 복지관에서 그림을 배운다고 하셨다. 타지에서 30여 년을 가장이자 생활인으로 살아온 고모는 이제, 꿈의 날개를 조금씩 펼쳐가는 자유인처럼 보였다. 혼자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적적하지 않으실까 걱정했던 마음은 기우였다. 그러고 보니 낯선 여자아이 그림은 고모의 내면 아이 같기도 했다.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이면 의욕과 열정으로 충만해지는, 해맑고 투명한 웃음을 짓게 되는.
고모는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내어오셨지만 나는 고모의 삶이 궁금했다. 지나온 시간의 양만큼 돌돌 감긴 이야기들이 고모를 통해 한 토막, 한 토막 풀려나올 때마다 나는 잔잔히 기쁨을 느꼈다. 피곤해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이런 시간 만들기를 미룬 채 양평을 떠났다면 느끼지 못했을 기쁨을. 밤 열 시가 넘어가며 두 아이가 하품을 참지 못하자 다시 고모 집을 나섰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까지 배웅하러 내려오신 고모를 힘껏 안아드린 뒤 헤어졌다.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또 와!
그런데 고모와 주고받은 카톡을 보다가, 휴대폰 화면을 위로 스크롤해 보니 이런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생일 축하해! 시간은 항상 꿈결처럼 지나가는구나.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아라.
지난 내 생일에 보내주신 고모의 메시지. 그때는 몰랐는데 고모 집을 다녀오고서 이 말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나는 30년 전의 고모처럼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고, 고모는 아이들 다 키우고 늘 그리워하던 한국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하셨고. 시간이 정말 꿈결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고모의 인생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을 맞이한 것 아닐까. 그림이라는 꿈의 새순들이 톡톡 얼굴을 내밀고 푸릇푸릇 자라 가는 중이었으니. 무엇보다 고모는 봄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으니.
양평은 어딜 가나 숲이 우거진 여름이었는데 고모의 집은 이제 막 봄이 시작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