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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Sep 11. 2024

천천히 하세요

익명의 타인에게 '행복 압정' 같은 말  

올여름, 집 앞 무인카페에서 한 잔씩 뽑아 마신 아이스커피는 일상의 큰 낙이었다. 카페 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고 멀끔하게 생긴 커피 머신은 꽤 만족스러운 커피 한 잔을 내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원두향을 맡으며 투명한 자갈 같은 얼음 조각들 오도독 씹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에 달라붙은 하루치 더위와 무기력함을 단번에 떨쳐내는 데 아이스커피 만한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날도 무더웠다. 오전 집안일을 대강 마무리하고서 무인카페에서 뽑은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입 안에서 경쾌하게 맞부딪히는 얼음 알갱이에 발걸음도 경쾌해지던 순간. 아파트 정문 앞에서 우회전하던 승용차가 내 앞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차는 단지 내로 진입하던 중이었고 나는 진입로 건너편 인도로 가려던 참이었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얼른 알아채지 못한 내 탓도 있었지만 그 차도 위협적인 속도로 코너를 돌았다. 나는 주춤하다가 인도 위에 그대로 멈춰 섰는데 운전자는 차 문을 내리더니 내게 언성을 높였다. "얼른 지나가요!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나는 운전자에게 먼저 지나가라는 표시로 부러 기다린 것인데. 그에겐 오히려 내가 방해물처럼 느껴졌나 보다. 얼른 가라 하니 그 차 앞으로 황급히 지나가는데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거참, 아저씨 성격 급하시네.' 다시 내 속도로 발걸음을 늦추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두근거리던 마음은 가라앉은 대신 화가 솟구쳤다. 사고가 날 뻔했던 건 둘째치고 좋은 마음으로 보낸 호의가 면박이 되어 돌아왔으니.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고 다시 만날 확률은 미미하겠으나 아이스커피로 만끽하려던 행복에는 분명 손상을 입었다.



그런데 하루 차이로 정 반대의 성정을 가진 이를 마주치기도 했다. 성격 급한 운전자처럼 자기 갈 길과 속도만 중요한 이가 있는 반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속도를 줄일 줄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빨리빨리'만을 외치는 인스턴트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을 편의점에서 보게 된 것이다. 



우유와 쓰레기봉투 한 묶음을 고르고서 계산을 하려던 참이었다. 계산대와 진열대 사이 통로가 상당히 비좁은 편의점이었다. 내 뒤로 금세 두어 사람이 줄을 섰다. 바로 뒤에는 키가 큰 젊은 남자가 택배 상자 두어 개를 들고 있었고. 자주 왔었는지 계산대 앞에 서 있던 편의점 직원과 짧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 게 들렸다. 좁다란 공간에서 뒷 손님들이 인접해 있으니 왠지 더 빨리 비켜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지갑 속 카드를 재빨리 꺼내어 꽂았다. 결제가 되기까지 흐른 몇 초가 길게 느껴지는 순간. 얼른 장바구니를 열어 우유 두 팩을 담고 있는데 이런 말이 내 뒤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하세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에는 여유가 실려 있었다. 택배 상자를 들고 서 있던 남자의 말이었다. 순간 귀를 의심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그는 굳이 서두를 것 없다는 쿨한 표정이었다. 아니, 앞사람에게 뒷사람이 이런 말을? 보통 이런 지루한 상황에서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해본 적 없던, 건넬 생각조차 못했던 말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불필요한 힘을 더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예상치 못한 친절과 배려의 말을 듣자 마음이 가뿐해졌다. 장바구니를 어깨에 둘러메고 편의점 문을 나서며 이어진 생각. 나도 다음번에 꼭 써먹어야지.



최근 방송 프로그램 '유퀴즈'에 '행복의 기원'을 쓴 심리학자 서은국 교수가 출연한 것을 보았다. 행복 연구가인 그는 행복이란 관념이 아닌 경험, 쉽게 표현하자면 '좋은 느낌'이라 한다. 사람은 '행복해야지' 마음먹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쾌(pleasure)'의 경험을 자주 느껴야 한다고.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일상을 돌아보게 했다. 나는 어떤 상황과 일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또 얼마나 자주 기쁜지. 모든 쾌락은 금세 소멸하기에 한 번에 큰 기쁨보다는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의 말이다. 행복감을 자주 느끼기 위해서는 날마다 '행복 압정'을 주변에 많이 깔아 두어야 한다고. 행복 압정이 깔린 만큼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라고. 재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인상적인 대목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행복 압정은 '사람 압정'이라는 것. 절친은 아니어도 일상에서 마주친 사람과 부딪힌 사회적 경험의 합이 사람의 행복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기억해야겠다. 하루 동안 스쳐 지나간 익명의 타인들에게 '나'란 사람은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그러니 오늘 만나는 이들에게 그냥 압정 말고 행복 압정이 되어 주어야지. 연약한 살 같은 마음, 찌르지 말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말들 자주 들려줘야지. 나의 하루와 타인의 하루가 서로 아름답게 덧대어지길. 우리 모두의 하루는 무관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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