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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Sep 26. 2024

햇빛을 골고루 쬐어주세요

믈 먹은 솜 같은 날에 필요한 말

아침과 밤의 바람이 차가워졌다. 한눈에 알아차릴 만큼 하늘의 채도가 높아졌다. 짙고 선명해진 하늘로부터 가을이 왔다.



학교와 직장으로 떠난 가족을 배웅하고 홀로 남겨진 집 안. 앞 베란다 가득 가을볕이 드리워져 있었다. 더 이상 여름의 열기로 숨 막히던 베란다가 아니었다. 무더위에 쓸모를 잃었던 공간은 빛이 넉넉히 담긴 선물 상자로 돌아왔다. 빛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빨래를 돌리고, 땀으로 찌든 베갯잇까지 몽땅 빨아 널었다. 베란다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되니 한쪽에 놓아두었던 화분들도 느긋한 마음으로 정돈해줄 수 있었다.



봄부터 키우던 호랑이콩 줄기는 여름 동안에도 빈 벽을 타고 열심히 덩굴을 만들었다. 여느 때처럼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다가 잎 뒤에 가려진 꽃 두 송이를 발견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고 은은한 색의 꽃이었다. 무더위를 견디고 피어난 꽃이라니. 더 반갑고 아름다웠다. 곧 호랑이콩도 열릴까. 바람대로 정말 콩이 달린다면 내겐 기적과 다름없다. 씨앗 하나에서  싹이 나고 세다 관둘 만큼 많은 호랑이콩잎들이 나오는 걸 보며 내내 신기해했으니. 무에서 유로, 없던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는 신비야말로 기적이 아니면 뭘까.    



피아노 위에 놓아둔 작은 화분에도 변화가 생겼다. 새 잎이 돋아난 것이다. 9월의 첫날, 동네 꽃집에서 데려 식물이었다. 그날은 유독 식물 화분에 눈길이 갔다. 꽃집 안과 밖에는 매혹적인 식물들이 많았다. 날이 더워  식물을 들이고픈 욕망을 누르고만 있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새로운 달의 시작을 기념한다는 핑계로 고심 끝에 식물 하나를 골랐다. 이름은 아글오네마(줄여서 '아오').



이 식물의 잎은 테두리는 초록색이지만 안쪽이 아이보리색이다. 꽃집 사장님은 햇빛을 많이 받을수록 잎이 초록색으로 진해진다고 했다. 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면 되고. 이어서 그녀는 진짜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눈빛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햇빛을 골고루 쬐어주세요. 그래야 한쪽으로 휘지 않고 곧게 자라거든요."  



그녀는 내 앞에서 빙글빙글 화분을 돌리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초보 식집사인 내게 식물 전문가의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수년 째 키우고 있는 몬스테라가 떠올랐다. 물 주기와 통풍은 신경 써도 그동안 자리까지 바꿔주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가지 하나는 거의 누워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호랑이콩 덩굴이 햇빛을 받는 쪽으로만 휘어지던 것도 생각났다. 빛의 힘이란 얼마나 센 것인지. 사람처럼 빛을 좋아하는 식물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꽃집 사장님에게 새 미션을 부여받은 나는 그날부터 열심히 화분을 돌려주었다. 빙그르르, 90도로 180도로. 식물에게 마음이 있다면 제 몸이 빙글빙글 돌아갈 때 좋을까, 귀찮을까. 아무렴 종일 가만히 놔두는 것보다는 주인의 기척을 가끔씩 느끼게 해주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까.



'아오'는 한 달도 안 되어 새 잎을 틔웠다. 원줄기에서 돌돌 말린 잎 하나가 솟아나더니 며칠 사이 활짝 펴졌다. 여섯 잎에서 일곱 잎으로, 식물의 고요한 확장을 목격하며 뿌듯하고 흐뭇했다.



아침 가을볕에 흠뻑 젖은 잎들이 세수한 듯 깨끗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근심걱정 없는 표정을 하고서. 사람도 그렇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다가도 볕이 있는 곳 찾아 적당히 걷고 나면  이내 가벼워진다. 마음까지 명랑해진다. 빛 속에선 온몸이 젖는다 해도 더이상 무거워지지 않는다.



작은 화분 하나를 들여다보며 기다리던 가을볕을 한껏 누린다. 식물도 나도 빛 속에 함께 몸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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