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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지

'처음'이라는 난관을 겪는 이에게 하고픈 말

by 혜일

아이 안과 진료를 마치고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보았다. 계획했던 일들을 순적하게 끝낸 후 차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내 앞의 차가 차단기 앞에 가로막혀 나가지 못했다. 이미 지나갈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차 후방 유리에는 하얀 글씨로 '초보운전'이라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내 뒤로도 어느새 몇 대의 차가 줄을 짓기 시작했다. 한참 후 운전석 쪽에서 아주머니가 내리셨다. 호리호리하고 우아한 차림의 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뒤에서 기다리는 내게 몇 번씩 고개를 숙이셨다. 사전 주차정산을 깜박하신 데다가, 하필 또 영수증은 트렁크 안에 있는 듯했다. 나도 아주머니를 향해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기다려드릴게요.



트렁크 문이 열리자, 나는 의도치 않게 아주머니가 구매한 장바구니 품목을 구경하게 되었다. 삐죽하게 솟아오른 푸른 대파와 이런저런 식품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등을 돌린 채로 서서 장바구니 속 영수증을 찾았다. 그동안에도 나를 바라보시곤 또 한 번 고개를 숙이셨다.



잠시 뒤 장바구니에서 기다란 종이영수증이 나왔다. 다행이었다. 나까지 휴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주차정산기 앞이 난관이다. 아주머니는 정산기 여기저기에 영수증을 대며 바코드 찍는 곳을 찾아 헤매셨다. 그 모습에 나가서 도와드릴까 망설이던 찰나. 차량 차단기가 열리고 아주머니 차는 속도를 내며 빠르게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나 역시 똑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운전해서 처음 같은 마트를 왔을 때였다. 장보기를 마친 후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차량 차단기가 올라가지 않았다. 살 걸 다 산 후, 주차 정산도 미리 잘 한 줄 알았는데.



급한 상황에서는 더 당황하기 마련. 조수석에 놓아둔 가방 안에는 장 본 영수증이 없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실은 장바구니를 황급히 뒤지기 시작했다. 차 트렁크 문을 여닫는 일도 익숙지 않던 운전 생초보 시절이었다. 내가 허둥대는 사이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는 차들로 금세 뒤가 꽉 막혔다. 심장이 콩콩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당시 내 뒤에 있던 차.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웠다. 정산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내가 아주머니를 기다린 시간보다 그때, 그 차의 운전자가 날 기다려준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아마 그 운전자 분도 내 차에 붙어있던 '초보운전' 스티커를 보았을 터. 나 역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분께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인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엄마도 저분 같았던 적 있어."

"엄마도 그랬어?"

차 뒤에 앉아있던 아이가 되묻는다.

"응, 엄마도 똑같이, 여기서."


창피했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래도 지금은 웃을 수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어 조금은 안도하며. 어쩌면 사람이란 내가 규정해 놓은 수치 이상으로 너그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나도 그런 너그러움을 갖추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럴 수 있지.' 나도 모르게 이 말이 새어 나왔다. 나를 앞서 떠난 아주머니를 통해 미숙했던 과거의 내게 인사를 건 것이다. '그럴 수 있지. 누구든 처음을 겪어내야 다음으로 나아가.' 내가 알든 알지 못하든 누군가의 기다림 덕분에 운전이라는 처음을 무사히 겪어냈다. 마트 주차장에서, 도로 한복판에서, 좁은 골목길 위에서.



몇 년 사이 운전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차 뒤편에는 초보 운전 스티커가 붙어있다. 이제 이건 떼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아직은 놔둬야겠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초보의 마음이란 무언가를 향한 첫 마음. 경험이 없고 미숙해서 난관에 부딪힐 순 있으나 마음만큼은 간절하고 가장 깨끗했을 순간. 그런 초보의 순간들이 아름답다, 귀하다 느껴졌다.



마트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길은 익숙해도 평소보다 조심조심. 잃어버린 어떤 것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 되어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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