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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정리하며

by 혜일

"올해는 11월까지 덥대." 누군가 했던 말에 지레 겁을 먹었던 걸까. 10월까지도 나는 여름을 정리하지 못했다. 또 더워질 수 있으니 하루만 더 두자고, 그대로 놔둔 선풍기에 잿빛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지우고 비워야 할 여름의 흔적이었다. 무더위라는, 버거웠던 대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럼에도 지나간 계절에 미련이 남았다. 여름의 열기만큼 나는 뜨거웠었나. 여름의 아침같이 환한 얼굴이었나. 여름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었나. 어떠한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 한 계절만큼의 생애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 어디론가 흘러가버린 듯해 아쉬웠다.



여름 내내 달구어졌던 대지가 서늘하게 식고 풍성한 녹음과 화려한 꽃들은 자취를 감추는 시기.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던 에너지까지 아껴 자연은 열매 맺는 일에 마지막 힘을 모으는 것일까. 가을은 조용히 찾아왔다.



장장 13년째 사용하고 있는 선풍기 앞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매 년 여름이면 거실에 두고 쓰던 우리 집 메인 선풍기다. 처음 샀을 때 선풍기 몸체는 분명 옅은 소라색이었는데 지금은 올리브색이 되었다. 햇볕에 그만큼 바랜 것이다. 그래도 얼룩덜룩하지 않고 예쁘게 바랬다. 선풍기 날개 위로 두텁게 쌓인 먼지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한편으론 '최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시원한 바람을 만드느라 제 몸은 늘 뜨거웠을 것이다. 수고했네, 수고했어. 먼지투성이를 하고도 너는 날마다 꿋꿋하게 돌아갔구나.



오래된 우리 집 선풍기. 결혼하고서 맞이한 첫여름에 샀더랬지 아마.



당시 살던 동네에 가전을 팔던 작은 가게가 있었다. 크고 작은 전자제품들이 들쑥날쑥하게 진열되어 있던 곳. 그 가운데서 우리의 선택을 받은 선풍기는 단돈 오만 원. 차가 없던 시절, 남편과 함께 선풍기를 산 뒤 직접 들고 집까지 걸어왔던, 어느 여름날을 기억한다. 그때 우리의 표정은 어땠을까. 더위에 지쳐 말없이 털레털레 걷기만 했을까.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고 있었을까.



디자인도, 성능도 지금은 구형이 되었으나 최근에 산 안방 선풍기보다는 이 선풍기가 훨씬 시원하다. 스탠드형 에어컨의 대각선 반대쪽이 선풍기 고정석이다. 에어컨을 틀고 선풍기까지 가세시켜 맞바람을 만들면 집안이 금세 시원해졌다. 선풍기는 매해 우리의 여름 안에서 종일 돌아갔다. 전기세 염려되는 에어컨은 밤에 꺼놔도 선풍기는 아침을 맞을 때까지 계속 켜두었으니.



그런데 올해는 선풍기 몸체가 작년보다 더 흔들거리고 웅웅 거리는 소음도 심했다. 저렇게 돌아가다 갑자기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 위태위태 돌아가던 선풍기 날개에 나와 남편의 시선이 함께 향했던, 어느 여름날을 기억한다. 십 년 넘게 썼으니 선풍기가 고장날만도 하다. 쓰다가 고장 나면 새것으로 바꾸는 일이야 손쉬울 것이다. 하지만 무슨 근거인지 이것보다 시원한 선풍기는 영영 못 찾을 것만 같다.



조인 나사를 풀어 선풍기 덮개를 열었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아이들이 태어나 십 대가 될 때까지. 우리의 여름을 책임져준 고마운 물건. 올해도 여름 내내 집 안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녀석이란 생각에 애틋해진다. 부디 내년 여름도 거뜬히 책임져주길. 먼지를 뒤집어쓴 날개들은 부드러운 수세미로 꼼꼼히 닦아주고 샤워기로 깨끗이 씻어냈다. 살이 촘촘한 선풍기 덮개도 쓱쓱 문질러주고.



씻어낸 것들은 물기를 털어 베란다 창가에 조르르 눕혔다. 안방에 있던 선풍기 한 대도 마저 분해하고 에어컨 필터도 떼어내 먼지를 씻어냈다. 하루 뒤 선풍기 두 대와 에어컨에 덮개를 씌우자 비로소 여름이 정리된 기분이었다. 지나온 계절에 대한 미련도, 후회도 씻겨졌을까. 새 가을을 집 안에 초대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여름 가전을 정리했으니 장과 서랍 속 옷들도 대열을 바꿀 것이다. 긴 옷은 앞으로, 짧은 옷은 뒤로. 입지 않는 옷들은 한 번 더 솎아 낼 기회로 삼고. 거실 바닥에 깔아 둔 대나무 자리도 둘둘 말아 창고에 넣어두고.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의 러그를 꺼내놓자. 때에 맞는 살림을 사는 일이 계절이 안겨준 내 몫의 일감이리라. 소소한 살림일지라도 정직하고 정성스레 해내고 싶다. 조금 더 뜨거워진 마음으로 여름을 정리하며 가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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