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연 Mar 11. 2020

꽃상여와 꽃버선

가을 운동회를 하는 날이었나, 동생이 병설유치원 졸업식을 하던 날이었나. 이제는 계절이 언제였는지도 아득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엄마는 등교 준비를 해주다가 울린 전화를 받고는 갑자기 짐승처럼 울었다. 술 취한 종태에게 복날 개 맞듯 맞을 때에도 그런 정도의 울음을 토한 적은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 날은 종태의 아내, 세 아이의 엄마가 아닌 오직 득문과 복순의 둘째 딸이 되어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었다.


득문과 복순은 젊은 시절 읍내에서 크게 식당을 운영했었다. 커다란 양철문을 따라 들어가면 마당이 있는 그야말로 '가든'이라는 상호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런 큰 식당 말이다. 송백에는 방도 문도 아주 여러 개였다. 화장실도 여러 개가 있고, 엄마는 잘 사주지 않는 데미소다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 사장은 매일 하얀색 정장에 백구두를 받쳐 신고 중절모를 쓰는, 사모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깨끼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읍내에서 가장 큰 고깃집. 한때는 지역의 유지들이 모여 고을의 중차대한 일들을 암암리에 결정하던 숨겨진 뒷무대 같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송백은 장사를 멈추었다. 득문과 복순은 장사를 하기에는 더 이상 젊지 않았고, 송백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과 번쩍이는 차들의 드나듦이 점점 뜸해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지만 송백은 여전히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너른 마당의 테두리를 따라 소나무가 둘러진 곳, 청설모와 도둑고양이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곳. 해마다 때가 되면 딱 한그루의 석류나무에 가지가 휘도록 석류가 매달리던 그곳을 모두가 떠나가도, 득문과 복순은 송백을 지키고 있었다. 


손님을 받던 많은 방들 가운데로 난 작은 사잇길을 따라 들어가면 안채가 나왔다. 안채로 들어가면 또 작은 마당이 나오고 거기에도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그리고 송백의 모든 음식을 만들어 내던 부엌 옆 가장 아늑하고 작은 방 두 개, 그곳에서 득문과 복순이 살림을 살았다. 

송백이 언제 장사를 처음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엄마의 자매들과 복순이 송백의 마당에 모여 함께 찍은 옛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득문과 복순은 송백에서 자식들을 길러 시집 장가를 모두 보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득문은 매일 아침 목욕탕에 다녀오는 부지런한 노인이었다. 몸과 마음을 늘 정갈히 하던 신사 같은 사람이 내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 목욕탕에 다녀온 득문은 복순과 함께 아침을 먹고 상을 물리자 텔레비전을 틀었다. 천천히 담배를 한대 태웠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다리는 앞으로 쭉 펴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다른 한쪽 다리 위에 걸터올린 득문 특유의 자세였다. 그리고 다시는 깨지 않을 깊고 달콤한 잠에 스르륵 빠져들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온 복순은 그런 득문을 바닥에 뉘이려다 문득 '아 이 양반 갔구나' 했다고 한다. 복순은 침착하게 아들딸들에게 순서대로 전화를 돌렸다. 그중 경희는 세 번째로 전화를 받았지만 가장 먼저 송백으로 달려갔다. 


졸업식이었는지 운동회였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동생의 행사에는 407호 아줌마가 엄마를 대신해 참석해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던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오후가 되어서야 송백으로 갔다. 송백은 다시 장사를 시작하는 것처럼 분주했다. 큰 솥에 고기가 삶아지고 있었고 맥주병과 소주병이 몇 짝씩이나 쌓여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행사 때 펼치는 그늘막이 여러 개 펼쳐져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득문과 복순의 자손들이 모두 모여 분주히 움직였다. 송백에서 가장 큰 방에 병풍이 세워졌고 그 뒤로 득문이 누운 관을 두었다. 나는 아직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왜 병풍 뒤에 누운 득문을 어린애들은 보면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나이였기에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데로 삶은 고기를 먹고, 청포도맛 데미소다를 마셨다. 


밤낮없이 많은 사람들이 송백을 다녀갔다. 득문의 아내와 자식들은 3일 동안 울지도 않고 쉴 새 없이 조문객들을 맞았다. 그때 우리 남매만 유일하게 그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외사촌들과 달리 장사 중에도 매일 학교에 갔다. 엄마는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을 학교에 꼬박꼬박 보내는 경희였다. 우리는 툴툴 대면서도 '학원은 가지 말고 여게로 바로 온네이. 갔다 오면 엄마가 또 맛있는 거 주께' 하며 천 원을 쥐어주는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득문의 죽음과는 별개로 학교에 출석했다.


장사의 마지막 날 상여꾼들이 커다란 꽃상여를 들고 송백의 마당으로 들어왔다. 복순은 '아이고 왔네' 하며 짧은 탄식을 뱉었다. 복순과 경호, 영희, 경희, 난희 그리고 득문의 형제자매와 일가 친척들이 삼베로 만든 누더기 같은 상복을 입고 상여 곁으로 모여들었다. 상여꾼들은 샤머니즘에 기반한 어떤 행위들을 잠깐 한 후 병풍 뒤 득문이 누운 관을 상여로 넣었다. 어린애들은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모이면 늘 꽥꽥 소리를 지르며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애들이,  표현이 서툴러 손자들의 손 한번 잡아주지 않던 득문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의식이 끝나자 꽃상여가 서서히 일어났다. 득문의 자손들이 그 뒤를 따라가며 곡을 시작했다. 장사 내내 한 번도 울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중 경희가 가장 큰 소리로 울었다. 경희는 '아이고 아부지요 아부지 가면 나는 우짭니꺼'하며 엉엉 울면서도 성실히 상여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걷다가 상여꾼들이 시키는 데로 가끔 꽃상여 속으로 돈을 던져 넣기도 했다. 그렇게 꽃상여를 따라 선산으로 갔다. 그곳은 득문이 앞세운 큰아들이 먼저 잠들어있는 곳이었다. 큰삼촌의 무덤 옆에 아주 큰 구덩이 하나가 파여 있었다. 삽을 든 조금 지친 기색의 사내들이 상여행렬을 맞아주었다. 상여꾼들이 상여를 내려 관을 옮기려 하자 복순은 관을 붙잡고 통곡했고 곁에 선 경호는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가족들 중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었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경호였다. 모두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 때 즈음 관이 들어간 자리는 바닥이 편편해졌다. 사토장이들이 묏자리를 빙빙 돌며 흙을 밟은 후 봉긋하게 봉분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때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내 입으로 명쾌히 설명할 수 없는 나이였다. 다만 내 생애 맞이한 첫 번째 죽음이 득문의 그것이었고,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조금 독특한 경험을 하며 아마도 죽음은 막연히 슬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뿐이었다. 그 후 약 20년이 흘러 나는 다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꽃상여는 없었지만 대신 발에 알록달록한 꽃버선을 신고 스테인리스 침대에 누운 경희를 손 쓸 수 없이 그저 바라봐야 했다. 죽은 경희의 몸은 관에 뉘어져 만발하는 꽃처럼 발산하는 불 속에서 사그라져 갔다. 경희의 죽음은 득문의 죽음과 달리 갑작스럽고 외로웠다. 아버지와 오빠의 옆에 묻힐 수 없었고, 경희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 후 나는 다른 이의 장례식에 몇 번 더 참석하며 죽음이 결코 우리의 삶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게 가족의 안녕을 물어보는 이에게 망설임 없이 엄마가 조금 일찍 돌아가셔서 가족이 별로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기도 했다. 어느 날 케이블방송에서 해주는 영화 코코를 본 이후 나는 몇 번이고 영화를 되돌려 보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늘 기억해줘야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영화의 내용을 나는 전적으로 믿어보기로 했다. 그곳에서 경희는 득문을 만나 함께 황금빛의 꽃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곳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 코코(coco) ost - remember me

https://youtu.be/pp2JuN5ENZ0


매거진의 이전글 프레셔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