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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Mar 22. 2024

수미씨감자

수미씨감자


오른 손목을 다치자

감자의 시간이 찾아왔다


한 보름 여행을 다녀온 뒤

씨감자 한 상자를 창가에 두고

꼬박 스무 날을 들여다보았다


한 손으로는 벅차고

두 손에는 차마 못 미치는

수미씨감자를 만져볼 때는


무명 기저귀 차고

안방을 헤엄치는 내 어릴 적

파란 몽골반점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인데


봄볕에 탱탱해진

창호지문을 마구 뜯는 사이

무슨 싹처럼 머리카락이 하나 둘씩 돋아나고


이제 묻을 때가 되었는가벼

하시면서 아버지는 뒷간에서 퍼온 재를

자른 씨감자에 바르곤 했다


산광최아,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가녀린 햇빛이

단단한 발톱과 이빨을 만드나니


어머니는 내 정수리에서

밤마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붓고

아침이면 긴 무명의 천을

빨랫줄에 길게 늘어놓곤 하였다


가장 낮은 곳에 들어가

알맹이를 위로 들어올리는 것이

감자의 일생이라니

나도 씨감자처럼 살아야겠지


왼손목마저 아파야

삔 오른손목이 나아지는

가장 단순한 치료법을

육십이 다 되어서야 알고는

하루 종일 씨감자만 쳐다보았다


누런 기저귀 고무줄 같은

감자의 부드러운 엉덩이만

하염없이 쓰다듬은

그런 봄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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