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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May 27. 2024

정직한 곡선

정직한 곡선


수면 위로 돌을 던졌을 때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것을

파장(波長)이라 부른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서

우주 속에 던져짐으로써 시작하니

그 자체 하나의 작은 파장이다.


파장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작과 끝지점을 연결시켜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것을 파문(波紋)으로 부르기로 하자.


보통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며 사는데

‘미스터윤’은 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가진 거 없으면서도 더 내주려 하고

남을 속여서 무엇을 얻어내려고도 하지 않으니

이것도 다 집안 내력이려니와

답답한 것은 처자식들이다.


하지만 어떠하겠는가

천성이 그렇게 타고 난 것을…


또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할 말 다하는 직선보다는

적당히 어리숙한 척 해야 하는

곡선이어야 가능했으니

어쩌면 미국행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물론 이쪽 진영에서 받은

충격과 황당함은 상상이었다고…


아무튼 1992년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자산과 사회변혁에 대한 이상,

그리고 아직 덜 오염된 맑스레닌주의를 들고

미국땅을 밟았다.


생존을 위해 수 많은 직업을 찾아나섰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허벌라이프’


번뜩 드는 생각이

돈을 위해서 이념을 버렸거나

돈을 왕창 벌어서 자본주의를 깨부수겠다는

당신은 미국판 보르헤스?


꼬박 32년의 세월이 지났다.

바둑판 같은 직선의 거리에

간혹 그곳을 관통하는 곡선의 LA도로들


거기에 쌓아놓은 소주병들이 집을 이뤄

얼추 계산을 해보니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도

반집 정도는 남을 만한 양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누구든 헛기침 할 기력이 남아있다면

파장은 위아래로 곡선을 그리며 퍼져간다.


빛도 역시 파장을 만들며

우리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빛의 흐름을 흔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파장이 아래위로 곡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짧은 순간이나마

참으로 정직한 곡선을 소유한 자가 있어서

엘에이 반경 60마일 안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행운임과 동시에

우주를 관통하는 빛의

큰 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물결의 무늬

참 잔잔하고 따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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