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유코치 티아라 Dec 07. 2021

우리 집이 3층이라서 안 뛰어내린다.

젖몸살, 유선염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 자기 난 우리 집이 3층이라서 안 뛰어내릴 거야.... "


무심코 신랑을 보고 어느 날 이야기했다. 신랑은 늘 산후우울증을 제일 크게 걱정하고 고민하던 

사람이라.. 이 말에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그것도 덤덤히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더 걱정을 한 것 같다. 


젖몸살로 하루하루 눈물로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젖몸살이 심해졌구나 생각했다.)

그러더니 가만히 있어도 치아가 달달달 부딪혀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추웠다. 

열은 39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신랑은 너무 놀라 응급실을 가자고 난리였고 난 너무 춥다고 이불을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모유 수유하는 엄마라 약을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춥고 오한이 들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 6.25 같은 전쟁통에 

제일 어이없는 건 젖은 늘 계속 돈다는 것이었다. 너무 아파서 누워만 있고 싶었으나 아이는 배가 고프고 

수유는 해야 한고 젖은 돌고 가슴은 아팠다. (이 무슨 세계대전 같은 일이란 말인가...)


다음날, 모유수유 관리 선생님을 출장으로 모셨다. 가슴을 보더니 깜짝 놀라시며 

"괜찮아요? 관리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 갑시다."라고 하셨다. 그 말에 더 놀라며 

"왜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되물었다. 

젖몸살이 심해지면서 유선염이 온 것 같다고,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과 약을 복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 아.. 내가 진짜 심하게 아픈 거구나.. 엄살이 아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변에 어른들이 계속 이야기를 해주셨다. 원래 가슴은 아프다. 출산보다 더 아픈 게 젖몸살이다. 

피가 나고 가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자주 물려야 한다.

이런 이야기 들을 너무 많은 들은 탓에 이 정도 아픔은 다 아픈 건 줄 알았다. 나만 엄살을 피운다고 생각했는데 

모유수유 관리 선생님의 저 한마디에 눈물이 차올랐다. 

가슴관리가 끝난 후,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갔다. 혼자서 하는 독박 육아라 보호자도 없었다. 


가슴 상태를 보기 위해 초음파를 봐야 하는데 보호자가 없으니 간호사 선생님께서 아이를 안아주시고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병명은 ' 유선염 ' 

유선에 모유가 제대로 비워지지 않아 균이 자라 유선에 염증이 생긴 것이다. 

염증이기에 발열, 오한, 두통, 몸살 등 염증반응이 나타난 것이었다. 

1주일치 약을 처방받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눈물이 났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왜 나만 아프지? 입덧도 낳을 때까지 했는데 유선염은 또 뭐니? 

애를 내가 낳았으면 모유수유는 남자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왜 도와주는 사람 없이 이 아픈데 

아이를 안고 혼자 병원을 와야 하는 거지... 

하;; 택시는 두릅 게 안 잡히네.. 


별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모유수유가 힘들고 젖몸살이 심해지고 유선염까지 걸리니 

모든 게 다 싫었다. 아이도 신랑도 나도 

정신이 나가서 결혼을 하고 미쳐서 아이를 낳았나 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유선염에 걸린 가슴은 상상을 초월하게 아팠다. 신랑이 내 앞을 걸어가면서 바람만 일으켜도 

너무너무 아팠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아픔이  처방받아온 항생제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유선염이 괜찮아질 때쯤 신랑에게 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 자기 난 우리 집이 3층이라서 안 뛰어내렸어.... "

이 말이 사실이다. 너무 힘들어 딱 죽고 싶었으나 우리 집은 3층이었다. 밖을 내다봤을 때 뛰어내린다고 해서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다리나 팔 이 부러질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럼 깁스를 할 테고 난 죽지 않을 테고 

젖은 여전히 돌고 있을 테니.. 여전히 수유나 유축은 해야 할 것 같고 안 하면 젖몸살과 유선염이 또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나.. 가슴이 아파서 죽고 싶었는데.. 가슴이 아플까 봐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현실이라니.. 하하;; 


우리 집이 3층인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신랑... 덤덤히 이야기하는 날 바라보는 신랑을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모유수유를 하면서 겪었던 많은 아픔들이 수유 코치를 하면서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엄마들의 아픔에, 눈물에 진심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수유 코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된장찌개는 할머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