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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라리며느리 Dec 27. 2020

내가 산후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경청과 관심이 주는 힘

전세사기로 전 재산을 다 날렸을 때도 우울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이성적으로 변했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우울한 감정으로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다. 출산 후 85%에 달하는 여성들이 일시적으로 경험한다는 '산후우울증'을 통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자연스레 사라진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경우였다. 긍정의 아이콘이었던 내가 산후 조리원에 있을 때부터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할지, 혼자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등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온갖 부정적인 상상과 함께 스스로를 괴롭혔다. 천정만 봐도 눈물이 났고, 아이가 너무 예쁘면서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났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당황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에밀리가 태어나고 고속도로 소음이 들리는 작은 집에 낮 동안 아기와 단둘이 갇혀 있던 그는 2주 만에 기운이 빠지고 우울해졌다.

"처음에는 식욕이 없어졌어요." 볼로가 말했다."그때 뭔가 잘못된 걸 알았죠. 제가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뭘 해도 입맛이 돌아오지 않더라고요." 볼로는 두툼한 패드를 댄 흔들의자에 앉아 발로 의자를 움직였다. "입맛이 사라진 다음에는 잠이 없어졌어요. 지금도 몇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아기에게 우유를 먹여야 하지만, 그때는 다 먹이고 아기를 침대에 내려놓은 후에도 그냥 깨어 있었어요.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죠."

식욕부진에 불면증까지 생겼을 무렵, 볼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이유로 울기 시작했다. "별게 다 슬펐어요." 복도 벽에 있는 균열, 새로 산 냉장고의 번쩍번쩍한 내부. 닭고기가 부위별로 포장돼 얼음물에 둥둥 떠다니고 정육 코너에는 마블링 있는 고기가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슈퍼마켓. p. 227


이번에 읽은 '블루 드림스'라는 책에 나온 이 대목이 예전에 내가 첫 아이를 낳은 후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내가 식욕이 없어져 모유가 저절로 말라버린 것과 2시간마다 잠도 못 자고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데도 잠이 들지 않았던 것까지 너무 비슷했다. 가만있어도 눈물이 나는 것까지도.


'블루 드림스'의 저자인 로렌 슬레이터는 35년간 정신과 약을 먹어온 심리학자이다. 환자이기도 하면서 심리학자이기도 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정신과 약에 관한 내용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던 정신과 약 이름들과 그 약들의 역사를 보며 어쩌면 나도 그런 약들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어쩌면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산후 우울증에서 내가 약 없이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집중해보려 한다. 바로 경청과 관심이다.




'경청'이라는 약



지금 생각하면 남편과 근처에 살고 있던 친구가 아니었다면 내가 심각한 상황에 빠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무서워졌다. 두 사람이 내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이해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아이와 씨름하고 있는 나를 감사하게도 남편이 제일 잘 알아주었다. 본인도 늦게 퇴근하고 오면 힘들었을 텐데 아기 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 있겠냐며 나를 더 다독여주었다. 낮에는 동네에 사는 친구가 오며 가며 집에 들러 내 말동무가 되어 주었고 힘들어하는 나를 도와주었다. 나에게는 가까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약을 먹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고백하는 행위 자체에 건강과 행복을 증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종류든 심리치료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의사의 전문 기술은 중요하지 않고,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오직 환자가 선택한 이야기다.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는 무의미하고 심리적인 성장이나 건강 증진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 "왜냐하면", "때문에", "그래서" 등 -를 사용했을 때 문제의 근본에 도달해 건강이 좋아진다. 강력한 약은 언어다. 우리는 말로 면역력을 강화하고 염증 세포를 억누르고 뇌에서 엔도르핀을 분비시켜 행복해질 수 있다. 따라서 치료를 하는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굳이 심리치료사의 도움 없이도 대화 요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연구로 확증된 사실이다. p.298

핵심은 따뜻함이었다. 연결이었다. 내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과 의미를 찾고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두려움으로 곪은 상처를 치유하고 차갑게 식은 우울감을 따뜻한 온기로 감쌀 수 있었다. p. 299


속마음을 털어놓는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건강과 행복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누군가가 이야기라도 들어주면 인간은 절망을 견딘다고 한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나로서는 누구나 노력하면 심리치료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경청'이라는 약은 상대방에게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처방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진심으로 경청하라'는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법칙 중 하나가 '경청'인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https://brunch.co.kr/@jini00024/35


경청은 한 번에 한 사람만 발언하고 상대방은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발언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건에 대한 의견을 진지하게 개진할 기회가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대화가 중요한 이유는 화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 사건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화하며 머릿속을 정리한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by 조던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관심'이라는 약


저자는 본인 문제의 근본이 날 때부터 타고난 문제가 아닌 잘못된 양육 때문이라고 한다. 성장기에 가정에서 사랑이나 따뜻함을 표현하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해 병이 생겼다고 저자의 치료사는 말했다. 이처럼 주위의 따뜻한 '관심'만 받았어도 저자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정신병으로 고통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특히 어렸을 때는 부모의 사랑, 특히 엄마의 사랑으로 아이가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기본적인 관심도 받지 못했다고 하니 지금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감정 이입이 많이 되어 마음이 아팠다.


까놓고 말해 나는 추하게 늙고 있다. 건강을 잃었고 가장 큰 원인은 정신과 약이다. 그럼에도 이 약들 없이 살 수 없다. 30년 이상 꾸준하게 복용량과 약의 수를 늘린 결과 내 뇌는 완전히 바뀌었고 매일 약을 먹지 않으면 신경 체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때로는 손자도 못 보고 죽을까 봐 두렵다. 약을 끊으려고도 해봤지만, 금단 증상은 내 몸을 황폐하게, 내 정신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깊은 우울증에 총을 산 적도 있고 아이들에게 유서를 쓴 적도 있다. 보내지 않은 편지는 지퍼백에 밀봉해뒀다. 결국에는 술래잡기를 그만두고 약으로 돌아가야 했다. 약에게 정신을 돌려받고 몸을 빼앗기면서 나는 몸과 마음이 별개의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확신하게 됐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처음부터 이미프라민을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중에 프로작을 먹지 않았더라면? 온전히 내 힘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답을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내가 현재 살기 위해 죽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 약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빨리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찬양하지 않으랴. p. 271


이 부분을 읽으면서도 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마음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죽하면 약이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약을 찬양한다는 말을 할까? 하지만 저자가 그동안 복용한 약을 먹기 전에 '경청'과 '관심'이라는 약을 먼저 복용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녀의 상황에 따라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래의 정신약리학은 순수하게 통찰 지향적 학문이 돼야 하고 모순적이지만 과거로 한 발 돌아가야 한다. 정신을 완전히 뒤집을 힘이 있는 강력한 약을 먹은 후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에 대해 10회 동안 이야기하는 치료를 받는다고 생각해보자, 컬럼비아대 종양학 자이며 퓰리처상 수상자인 싯다르타 무케르지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는 항우울제와 대화 요법을 결합했을 때 최상의 결과가 나온다는 데 주목했다. 이유가 명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무케르지는 이렇게 썼다. "세포를 키우라고 뇌와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면 뇌의 의식 영역에서 세포의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이 바뀐다. 대화를 하면 다른 화학물질이 나와 신경세포가 성장하는 유사한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 의사와 환자는 환자의 마음을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고, 의사의 역할은 안내자로 바뀐다. 단순히 처방전을 휘갈겨 쓰는 사람이 아니라 훨씬 많은 일을 하는 진정한 의료인이 되는 것이다. p.447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은 약을 복용하기 전에 다른 많은 방법들을 먼저 시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잠시 겪었던 우울증은 저자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지만 나에게 남편과 친구가 있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따뜻한 관심과 그녀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항우울제와 대화 요법을 결합했을 때 최상의 결과가 나온다는 말은 즉, 약을 복용하기 전에 대화 요법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정신과 약이 많이 개발되고 있지만 정신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더 늘어가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내 주위를 조금 더 따뜻한 관심으로 보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6006287?OzSrank=1


참고도서 <블루 드림스> 로렌 슬레이터 지음


<12가지 인생의 법칙> 조던 피터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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