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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른시절(터널 끝에서)

긴 터널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

by 보름달


“긴 터널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선생님이 내게 써주신 글이었다. 그때도 인상적이었는데, 그 이후로도 줄곧 인상적이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수험생활을 긴 터널이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눈앞에 터널만 지나가면 밝은 세상 속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수능이 끝나고 학교를 졸업해도 인생은 끝없는 터널 안이다.


긴 터널을 지나왔다고 자축했고, 축하받았다. 그러나 한때의 소란스러웠던 폭죽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나는 헤맸다.

터널 밖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곁눈질해 가며 다른 사람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해 본다. 조금 더 괜찮아 보이는 모습을 눈여겨본다. 나는 더 나은 나로 살기 위해 책을 읽고, 나이스한 사람의 행동과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가장 최근, 나의 적의 못난 모습을 모방하기도 한다. 무수한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본래의 모습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내 고유성은 흩어졌다.


터널 속에는 방황이 없었다. 우르르 몰려가며 그저 무리의 선두를 뒤쫓아 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까지 달려온 걸까?


“긴 터널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


터널 밖으로 뛰쳐나가던 내 뒷모습을 축하했을 선생님이 가끔 생각난다.

선생님은 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돼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터널을 지나왔고, 다시 터널로 되돌아온 사람. 선생님의 터널 밖에는 뭐가 있었을까?

무한함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던 그 끝에는 말이다. 소원을 담아 잘 띄워 보내려는 풍등이 있었을 거다. 소원을 담은 무수한 풍등의 행렬이 말이다. 몇몇은 힘없이 바로 가라앉았을 테고, 몇몇은 기대 이상으로 하늘 높이 높이 올라갔을 거다.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높이.


나는 그때 선생님만큼의 어른이 됐다.

배웅받으며, 지나왔던 터널도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매 순간이 처음인 터널 밖에서 주춤거리며, 시작된 나의 어린 어른 시절.

그 시선으로 터널 길을 따라가 본다. 아득히 멀어진 줄 알았는데 선망인 듯 아련하고 뚜렷하다.


잔망스러운 생각에서 시작된 내 방명록. “선생님 제가 친구들이랑 선생님께 편지를 받고 있어요. 저를 위해 편지를 써주세요” 그 방명록에서 흘러나온 선생님의 인사가 터널 안에 매달린 시계추처럼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긴 터널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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