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데는 이유가 없다. 없는 이유를 찾으려고 하니, 비슷비슷한 얼굴의 잡념들이 우글우글 달라붙는다.
내 기분은 내 것인데 내 손에는 닿지 않는다. 날뛰는 놈을 잡아보려다 이내 그만둔다. 사람의 성격은 상충과 상쇄를 반복하여, 일관성을 잊은 지 오래다. 별거 아닌 일에 파르르르 화내는 나와 사소한 일로 실없이 웃는 나는 같은 저울 끝에 놓여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한 적 없기에 죽음을 모른다. 삶은 이미 주어졌지만, 뜨거운 감자처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다.
왜 태어났냐는 질문에 법륜스님이 답했다.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긴 것이에요. 태어나는 데는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있기 이전에 삶은 주여져 있어요. 즐겁거나 혹은 괴롭거나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에요. ‘왜 태어났을까’가 아닌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세요”
어떻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꾼 질문에도 질문이 졸졸 따라붙는다. 저는 “왜”보다 “어떻게”가 더 어려운 거 같아요.
나는 '오랜 어른'이다. 본인 나이도 헷갈려했던 어른들의 유머가 이제 내게도 통한다. 어른이 되면 새로운 타이틀을 얻기 어렵다. 8살이 되면 초등학생이 되고, 14살이 되면 중학생이 됐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데, 그 이후에는 딱히 되는 게 없다. 어른이 종착지는 아닌데, 등 떠밀려 어른이 되면 이 놈의 타이틀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을 얻고, 나이를 잊는다.
해가 바뀌기 전, 잘한 일과 아쉬웠던 일, 그리고 새해의 계획을 적어본다. 잘한 일들을 끄집어 몇 개 적어봤다. 쓰고 나니 별거 아닌 거 같아 민망했다. 2023년이 어떻게 지나갔더라? 2023년 12월 31일, 한 해가 마무리되기 몇 시간 전, 잘한 일을 찾지 말고 만들기로 했다. 2024년을 몇 시간을 앞두고 장기기증을 신청했다.
죽기 전,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 호랑이가 아닌지라 가죽을 남길 수는 없고, 내 이름을 기억해 줄 아이도, 그렇다고 대단한 작품도 아직 없다. 장기기증 신청을 하고 나니, 남는 것이 분명히 생겼다. 오랜만에 '오랜 어른'에게 새로운 타이틀이 생겼다.
장기기증을 신청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핸드폰 인증 후, 장기기증 혹은 안구기증, 또는 둘 다를 선택하면 된다. 장기 기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뇌사상태일 때 신장, 간장, 심장, 폐, 췌장, 췌도, 소장, 안구, 손, 팔, 발, 다리를 기증하는 것. 다른 하나는 사후에 안구를 기증하는 것이다. 사망한 지 6시간~12시간 이내에 연락하면 된다고 한다. 생각보다 2023년 누적 기증자가 많지 않았다. 나는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등록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여러 사이트가 존재했다. 운전면허를 재발급받으면 그 아래에 장기기증이라고 작게 표시된다고 한다.
뉴스에는 연일 각종사고 소식이 쏟아진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사건과 사고가 백색소음처럼 흐른다. 오늘을 살아낸 내게는 그 소음이 무감각하다.
자연사가 가장 큰 축복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친구와 우스갯소리로 “우리 꼭 자연사하자”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 허망함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선택한 것이 장기기증 신청이었다. 2023년에 잘한 일이자, 오랜 어른다운 생각이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장기기증 등록증이 우편으로 왔다. 보고 있자니 보험증서처럼 든든했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갑작스러운 백색소음에 ‘다행이다’ 싶은 게 하나쯤 있었으면 했는데, 찾았다. 다행이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돌아가셨을 때, 안구기증을 하셨다했다. 나도 죽을 때만큼은 한평생을 숭고하게 살았던 사람과 같다는 생각에 마음에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