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하고 싶어요 : 당신은 훌륭해요.
인생은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 카메라 필름이다. 더 좋은 때를 위해 아껴둔 필름처럼, 결국에는 다 쓰지 못하고 끝난다. 우리는 순간 놓치고 깨닫는다. 마지막을 마지막이라 부르지 못하고, 흘러간 그 뒷모습에서 답을 얻는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은 이미 식어버려 쓸쓸한 시선 끝에 놓이고 우리는 아껴둔 필름을 세어본다.
내가 기억하는 첫 칭찬은 어릴 적 그렸던 개구리 그림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가 학교에 방문했다. 선생님은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며, 교실 뒤편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벽에는 내가 그린 개구리 그림이 있었는데, 엄마가 보기에도 썩 멋졌다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개구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집이며, 학교 쉬는 시간이며 쉴 새 없이 그려 자랑하던 개구리 그림. 칭찬받으려 종일 그려대던 같은 듯 조금씩 다른 개구리들. 들뜬 마음으로 개구리를 그리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 갔을까?
고3 수업시간, 작문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다가 칭찬해 주셨다. “음, 그래 훌륭하다.” 그 칭찬은 내가 들은 칭찬 중 단연 최고였다. 그 칭찬 한마디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안에 가득 차있다. 군더더기 없는 칭찬이었다. 왜 잘했는지에 대한 부가설명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그 한마디만 하셨다. 훌륭하다니, 내가 위인도 아닌데 숙제 하나 잘했다고 들을 수 있는 칭찬인가 싶어 감격스러웠다.
훌륭하다는 칭찬이 내 마음에 들어온 이후부터 나는 훌륭하다는 칭찬을 쓰는 사람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그저 지금의 나처럼 훌륭하다는 단어를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칭찬받기 위해 개구리를 무한히 그려내던 아이는 이제 자라나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남발하는 어른이 됐다.
물론 모두가 이 칭찬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아니다. 내 친구는 훌륭이라는 단어를 아무 때나 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훌륭이라는 단어가 퇴색된다고.
그러나 그런 충고는 듣고 싶지 않다. 일반인에게는 접근조차 부담스러운 ‘훌륭’이라는 단어를 나는 마구 쓰고 다닐 거다. 당신의 장점을 발견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해주고 싶다. “오! 정말 훌륭해요.”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나는 훌륭이라는 단어가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는 소수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게 눈을 맞추고, 내 이야기를 따뜻하게 들어주는 당신은 이미 ‘훌륭’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완벽한 때가 오지 않아 우물쭈물할지라도, 더 좋은 때가 오지 않더라도, 괜찮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 당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보자.
“당신은, 우리는 이미 훌륭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