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넘게 인사담당자에게 하는 혼잣말
입사지원서는 유통기한이 짧다. 30초라고 했나? 인사담당자가 서류를 검토하는 시간이.
이력서를 채우는 데는 몇 년이 걸렸는데, 너의 선택지에서 증발하는 데는 30초도 필요치 않다.
생물 같던 내 지원서가 말린 황태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다.
비닐봉지는 일회용으로 만든 게 아닌데, 일회용이 됐다. 종이봉투 대신 여러 번 쓰라고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매번 새 비닐봉지를 찾으면서, 일회용품이 됐다. 내 입사지원서는 일회용으로 만든 게 아닌데, 지원한 회사명을 쓰고 제출을 누르는 순간, 일회용이 돼버린다. 일회성 사용이 유일한 쓰임인 이력서.
네가 나를 좋아하도록 글을 써본다. 수 천자가 되는 이 글은 마치 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나에게 관심이 없는 너에게, 하루에도 수십,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받는 너를 향해 쓴다. 나는 더 특별하다고, 나는 너를 더 사랑한다고 쓴다. 나의 경험과 역량이 네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도록 쓴다. 네 맘에 들고 싶지만, 네가 아니더라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 보내기 전, 너의 이름을 여러 번 확인한다. 이 연애편지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면 안 되니까.
너는 어리고, 1~3년 사이 경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적당한 경력과 적당한 학력을 가진 사람. 모든 게 적당해, 무엇이 좋다기보다는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 고백해 들어간 회사에서 여러 번 나온, 경험 많은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다. 그러니, 내 고백을 받지 않는 너를 이해한다.
너는 “년 수”에 집착한다.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 잘했는지는 근속연수 다음이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리지 못한 내 경력이 발에 끈적하게 붙었다. 짧은 경력들이 질척이게 들러붙어 네게 다가가기 힘들다. 그렇지, 근속연수가, 무차별적인 끈기가 회사에서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 고백을 받지 않는 너를 이해한다.
며칠 전, 전 직장 팀장님을 만났다. 나는 은연중에 팀장님이 이직한 회사에 내 자리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팀장님이 말했다. 어느 회사나 나를 티칭 해줄 만한 인물은 없을 테고, 부딪히는 사람의 직급이 비슷하거나 더 낮다면 더 힘들 거라고 했다. 그 기간만 다를 뿐이지 나는 곧 매너리즘에 빠질 것이라 단언했다.
어찌 그리 단호하게 말하는지 이상하게 들렸다. 나를 치켜세우려고 시작했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거절의 말이 되어있었다. 나를 알아서 하는 말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 만남에서 내가 계획한 0.1%의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아닌지 나는 칭찬도, 비난도 아닌 아리송한 말을 듣고 돌아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자꾸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이 도둑질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맞을까?
입사지원 자체가 적절하지 않은 대기업에, 과장 직급은 잘 뽑지 않은 중소기업에, 이겨낼 자신이 없는 스타트업에, 내가 도둑질할 자리가 있을까?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무엇을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언제 도망가야 하고, 언제 싸워야 할까? 도망가야 할 때 싸우고, 싸워야 할 때 도망친 것은 아니었나? 너에게 보내는 혼잣말을 멈춰야 할까? 더 크게 외쳐야 할까?
평소에는 30초도 말을 건넬 수 없는 너에게, 오늘은 참 길게도 혼잣말을 해봤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인홀트 니버 <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