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May 08. 2023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쓰는 연애편지

30초 넘게 인사담당자에게 하는 혼잣말


입사지원서는 유통기한이 짧다. 30초라고 했나? 인사담당자가 서류를 검토하는 시간이.

이력서를 채우는 데는 몇 년이 걸렸는데, 너의 선택지에서 증발하는 데는 30초도 필요치 않다.

생물 같던 내 지원서가 말린 황태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다.


비닐봉지는 일회용으로 만든 게 아닌데, 일회용이 됐다. 종이봉투 대신 여러 번 쓰라고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매번 새 비닐봉지를 찾으면서, 일회용품이 됐다. 내 입사지원서는 일회용으로 만든 게 아닌데, 지원한 회사명을 쓰고 제출을 누르는 순간, 일회용이 돼버린다. 일회성 사용이 유일한 쓰임인 이력서.


네가 나를 좋아하도록 글을 써본다. 수 천자가 되는 이 글은 마치 너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같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나에게 관심이 없는 너에게, 하루에도 수십,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받는 너를 향해 쓴다. 나는 더 특별하다고, 나는 너를 더 사랑한다고 쓴다. 나의 경험과 역량이 네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도록 쓴다. 네 맘에 들고 싶지만, 네가 아니더라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 보내기 전, 너의 이름을 여러 번 확인한다. 이 연애편지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면 안 되니까.


너는 어리고, 1~3년 사이 경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적당한 경력과 적당한 학력을 가진 사람. 모든 게 적당해, 무엇이 좋다기보다는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 고백해 들어간 회사에서 여러 번 나온, 경험 많은 나는, 내가 생각해도 좀 부담스러울 것 같다. 그러니, 내 고백을 받지 않는 너를 이해한다.


너는 “년 수”에 집착한다.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 잘했는지는 근속연수 다음이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리지 못한 내 경력이 발에 끈적하게 붙었다. 짧은 경력들이 질척이게 들러붙어 네게 다가가기 힘들다. 그렇지, 근속연수가, 무차별적인 끈기가 회사에서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 고백을 받지 않는 너를 이해한다.


며칠 전, 전 직장 팀장님을 만났다. 나는 은연중에 팀장님이 이직한 회사에 내 자리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팀장님이 말했다. 어느 회사나 나를 티칭 해줄 만한 인물은 없을 테고, 부딪히는 사람의 직급이 비슷하거나 더 낮다면 더 힘들 거라고 했다. 그 기간만 다를 뿐이지 나는 곧 매너리즘에 빠질 것이라 단언했다.

어찌 그리 단호하게 말하는지 이상하게 들렸다. 나를 치켜세우려고 시작했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거절의 말이 되어있었다. 나를 알아서 하는 말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 만남에서 내가 계획한 0.1%의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아닌지 나는 칭찬도, 비난도 아닌 아리송한 말을 듣고 돌아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자꾸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이 도둑질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맞을까?

입사지원 자체가 적절하지 않은 대기업에, 과장 직급은 잘 뽑지 않은 중소기업에, 이겨낼 자신이 없는 스타트업에, 내가 도둑질할 자리가 있을까?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무엇을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언제 도망가야 하고, 언제 싸워야 할까? 도망가야 할 때 싸우고, 싸워야 할 때 도망친 것은 아니었나? 너에게 보내는 혼잣말을 멈춰야 할까? 더 크게 외쳐야 할까?


평소에는 30초도 말을 건넬 수 없는 너에게, 오늘은 참 길게도 혼잣말을 해봤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신이여, 바라옵건대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라인홀트 니버 <기도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