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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심 Apr 21. 2021

명품이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가

35-2.

나는 명품을 은밀하게 좋아한다.


속으로는 명품을 좋아하지만 명품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은근히 싫어한다. 분명 명품을 좋아하면서도, 그런 내 모습이 달갑지만은 않은 것은 왜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꽤 이른 나이부터 명품을 사기 시작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냐마는,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애지중지 키우시던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갖고 싶은 것'이라면 아낌없이 사주시곤 하셨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혹독하게 경제적 독립을 시키셨으나,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님 덕분에 인생의 황금기를 맛보았다.)


선천적으로 깔끔을 떠는 탓에 물건을 꽤 애지중지 썼고, 그렇게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한 물건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꽤 빛을 발한 명품도 있다.


예를 들면, 부모님께서 대학 입학 선물로 사주신 샤넬백이 그러했다. 그때는 샤넬백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게 조금  친숙한 브랜드인 프라다와 루이비통보다 비싼 브랜드였던 샤넬 매장에 처음 들어가  날이었는데, 그날 부모님은 점원들의 추천에 따라 어린  어깨에 잠시 걸쳐본 클래식 백을 사주셨다.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며 사주셨던 나의  샤넬 클래식 백은 대학교 내내 내가 아껴들었던 가방이었고 졸업 , 10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가  드는 가방이다. 물론 예전보다는 때를 탔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선물이었던 만큼 내겐 특별한 물건이다.  샤넬이 매년 가격을 인상해준 덕분에 지금은 내가 주고  금액 대비 3배는 비싼 가방이 되었다. 15년이나  가방을 지금의 신품 가격에 구매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들고 다닐  기분만큼은 900 원짜리 가방을 들은  같아, 돈을  기분이 든다.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할머니, 할아버지 시절부터 현금 가치가 있다고 하던 롤렉스 시계를 나는 20대 중반에 대학 졸업 선물로 받았다. 그때는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며 질색을 했지만, 나름 혜안이 있으셨던 부모님은 내게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라며 꾸역꾸역 그 시계를 사주셨다.


노블한 디자인이 싫어 서랍 속에 고이 보관만 되어있던 그 시계는 10년 동안 가격이 꾸준히 올리 지금은 그때의 가격의 2배 가격이 되었고, 또 그 가격에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 그리고 가격이 오르는 시간 동안 불행인지 다행이지 나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그 시계가 제법 잘 어울린다. 가끔 그 시계를 차고 나가면,  지인들이 “새로 샀어? 요즘 구하기 어렵다던데 어떻게 구했어?”라고 물어주는데 돈을 번 것 같아 뿌듯하다.




그러나,


돈을 번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은 명품 브랜드의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것을 잘 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사이, 2배가 아닌 10배 이상으로 그 가치가 껑충 뛴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2~3배의 가치 상승은 좋은 투자가 아닐뿐더러 현금화하려면 감가상각을 면하지 못하니 나는 '샤테크'나 '롤테크'가 아닌 그저 두고두고 잘 사용하고 있는 물건에 소비한 것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명품 브랜드의 가격 인상이 달갑지 않으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나도 모르게 '오늘이 가장 쌀 때'라는 생각이 들어 불매운동을 하기는커녕 지갑을 연다.


요즘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까닭일까.


언젠가부터 매장에 입장하기 위해 서는 줄이 나날이 길어지고 있다. 그저 매장 안을 구경하기 위해서도 길게는 3~5시간씩 대기를 해야 하는 것을 보면 나는 가끔 그 매장의 하루 매출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코로나 시대에 손님이 하루에 한 명도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업장이 너무도 많은데, 명품 브랜드들의 매출이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코로나도 뚫는 명품 열풍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제는 기나긴 대기줄도 모자라 인기상품을 손에 넣기 위해서 백화점 오픈 시간  시간 전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중에는 '리셀(re-sell)’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픈 시간에 가지 않으면 인기상품을 받기 어려운 실정 때문에 새벽부터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오픈런' 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 있다가 백화점 셔터가 열리면 우다다 안으로 뛰어들어가 내 돈을 쓰고 싶지는 않다. 돈을 쓰면서 대우받고 싶어서는 아니다. 하지만 원가보다 훨씬 비싼 사치품을 사면서, 내 체면까지 구기고 싶지는 않다는 일종의 작은 시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열흘 전쯤 처음으로 옷장 속의 명품 가방을 세어 보았다. 각각의 가격을 떠올리며 계산해보니 어림잡아도 몇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다른 곳에 쓸 수도 있었을 꽤 큰돈을 옷장 속에 진열해 놓은 셈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질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평소 물욕과 과시욕이 넘치는 편도 아니고, 패션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명품 가방은 왜 사모았는지 스스로를 살짝 꾸짖은 뒤에 문득 나 자신에게 물었다.


'명품이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가'


글쎄다, 내 가치를 높여주기보다는 명품 브랜드의 자산 가치를 높이는 듯하다.


우습게도 가파른 속도로 가격이 오르는 명품 가방을 사는 일도 요즘은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예쁜 물건을 구경하고, 고르고, 소유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근래에는 그 즐거움을 얻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공이 너무  탓에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분명 나와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성황인 명품의 세계를 나는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없지만, 감정적으로는 아직까지 좋은 “그린라이트 상태다. 명품이 사용자의 가치가 높여서가 아니라, 날로 높아지는 명품의 셀프 가치로 하여금  소유하고 싶어지는 모순적인 요즘의 상황.




지난 주말, 잠시 백화점에 들렸다. 1층의 화장품 매장에서 사야 할 것을 사고는 바로 나오기 아쉬워 1층의 한 명품 매장 앞 대기 줄에 섰다. 특별히 뭘 살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잠깐 기다려서 구경이라도 하자 싶었다. 그 줄에 서 있는 5분 남짓의 시간 동안에도 몇 사람들이 더 왔고 줄은 금세 길어졌다. 남편과 함께 쇼윈도 안을 기웃거리며 서 있다가, 조용히 남편의 손을 이끌고 줄에서 나왔다.


명품을 구경하기 위해 대기하기에는  시간이 명품보다 훨씬  소중하기에.




*이미지 출처: dailymail.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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