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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심 Apr 15. 2021

나 은근히 백수 체질인가봐

35-3.

예전에 회사의 한 선배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회사 체질이 아니야."


선배는 이제 임신도 계획하고, 집안일에도 몰두하고 싶다며 멋진 경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퇴사를 선언했다. 회사 선배였지만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터놓고 하는 각별한 사이였기에 나는 오지랖인 줄 알면서도 "후회하지 않겠어?"라고 물었었다. 그런데 회사가 체질이 아니라는 답을 들으니 더 이상 한마디도 더 할 수 없었다. '그래, 한번 사는데 체질에 안 맞는 회사생활할 필요 없지'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나는 백수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취직을 한 나는 혹독한 신입사원 시절을 보냈었다. 남성 중심적이었던 회사 분위기에서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제 사회생활 제법 했지' 싶었을 때쯤부터 주량이 소주 반 병에서 2~3병으로 늘어나 있었다. 돌이켜보면 회사 화장실 구석 칸에 들어가 훌쩍훌쩍 울기도 했었는데, 그 기억도 이제는 까마득하다.


꼬박 십 년은 채우지 못했지만 거의 10년 프로 직장러가 되어가고 있었던 나는 갑작스러운 일련의 일들로 인해 퇴사를 하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백수가 되어버렸다.


직업란에 줄곧 학생 또는 회사원이라는 단어밖에 써보지 않았던 나는 자기소개를 할 때면 직장 또는 하는 일을 서두에 얘기했었는데, 처음 맞이하는 '백수' 생활은 낯설게만 느껴졌고 회사에서 보내지 않는 긴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비몽사몽 채비를 마치고 후다닥 집을 나서던 나는 평일 아침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바쁘게 갈 곳이 없으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SNS를 하거나 소소하게 주식을 사고팔았다. 평소 같으면 회사에 도착해 헐레벌떡 컴퓨터를 켜고 1층에 커피를 사러 내려갔던 시간인데, 한가로이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TV를 켰다. 회의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미뤄지는 일도 없었고, 동료들과 '오늘은 또 뭘 먹지?' 고민하는 일도 없는 일상은 평온했지만 따분했고, 좋고 싫음을 떠나 그저 낯설었다.


준비하지 않은 채, 백수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회사생활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까닭일까.


나는 마침내 자유를 찾은 도비가 아니라 바보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백수 생활을 바보같이 보낸 지 한 달쯤 지나자, 나는 매일 할 일이 있는 백수가 되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주욱 나열해 보니 리스트가 꽤나 길었다. 이직은 어느 정도의 기다림을 요하는 일이기에 조금 더 여유 있게 후회 없이 주옥같은 백수 생활을 보내보기로 했다.


우선, 평일 낮 시간에 백화점에 가보았다. 사실 주말에 백화점 가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긴 행렬과 인기 많은 매장들에는 늘 사람은 많고 물건은 적은 것 같아 평일 낮에 한가로이 쇼핑을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평일 낮에도 코로나 시대가 무색하게 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에 모여있었다. 주말의 모습과 다를 것 없이 몇몇 매장은 오전 11시에 도착해도 그 날의 대기 접수가 끝나 있었고, 백화점 내 카페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주말에는 가족 단위 또는 연인들이 많았다면 평일 낮에는 쇼핑을 위해 백화점을 혼자 찾은 이들이 꽤 여럿 보였고, 또 확실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았다. 평일 낮 시간의 백화점 쇼핑이 유독 더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때때로 긴 줄에 동참했고 나름 전투적인 쇼핑을 통해 그동안 사고 싶었던 가방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  


코로나를 핑계 삼아 집에서 하루 종일 드라마 정주행을 하기도 했다. 평이 좋아서 보고 싶었지만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아까워 미뤘거나, 퇴근 후에 틈틈이 보다가 잠들었던 드라마에 몰두해 무려 시즌 8개를 다 섭렵했다. 한 미군이 알 카에다의 포로로 잡혀 있다가 8년여 만에 극적으로 구출되면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의 이야기인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에 푹 빠져 보다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며칠을 내리 TV 앞에서 보냈다.


하지만 드라마 몰아보기의 부작용인지, 난생처음으로 TV에 질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TV와, 정확히 말하면 '넷플릭스'와 거리두기를 하게 되었다. 퇴근 후, 아무 생각 없이 TV 앞에 앉아있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는데, 요즘 나의 TV 시청 시간은 하루 30분을 넘기지 못한다. 긍정적인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답을 곰곰이 생각해야 했던 나는 예전의 취미들을 하나, 둘씩 찾아가고 있다. 물론 취미가 많은 직장인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 편이었다. 체력이 안 받쳐준다는 핑계로, 언젠가부터 퇴근 후 멍 때리며 TV 보기가 유일한 취미였던 나는 요즘 슬슬 취미 부자가 되어가고 있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글 쓰기, 음악 듣기, 책 읽기, 요가 등 조금씩 취미가 다채로워지고 있다. 채광이 가득한 낮 시간의 집에서 이것저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시간 제약 없이 하다 보면 꽤나 행복한 기분이 든다.


맞벌이 부부로 지내다 보니,  시간에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안쓰러워 결혼하면서 친정에 두고 왔던 반려견도 잠시나마 함께 지내고 있다. 매일 아침 7시만 되면 어김없이 배고프다며 침대 위를 오다니면서 나를 질겅질겅 밟고, 낮에 산책을 다녀오면 햇볕  드는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난다. 7살이라 견생으로 치면 어느덧 중년 여성이  셈인데,  아직도  눈에는 아가 같기만 하다. 까맣던 얼굴에 희끗희끗  털들이 늘어난 것을 보면 속절없이 가는 세월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가인 나의 ‘래미’.



학생 시절 이후 아주 오랜만에 엄마와 평일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만에 묵은 옷장 정리를 했다. 평소에도 정리 정돈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시간이 여유로울 때에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겠다는 생각과 함께  입거나  쓰는 세서리류를 모아 '당근마켓' 올렸는데 너무 저렴하게 올린 탓인지, 불티나게 리는 바람에 심각하게 장사에 소질이 있나 생각해 보기도 했다.    




좋았던 일들이 더 많았지만 백수생활을 하는 동안 몇 번의 면접도 보았고, 시원하게 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번의 낙방 끝에야 내게 맞는 직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무엇보다 백수생활을 하는 짧은 시간 동안 몸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작은 수술을 받아야 해서 한동안은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처음 백수생활을 맞이해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던 나는 이제 온데간데없다는 것이다. 급기야 다시 하루가 짧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나 은근히 백수 체질인가 봐'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도 당당하게 '회사 체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은근히 좋기도 하다.


그동안 구상만 하고 미뤄뒀던 리스트의 마지막 미션을 이루기 위해 천천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 요즘...


안되면 되게 하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을 유독 많이 떠올린다.  


그렇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또 여유로운 서른다섯 살의 봄을 보내고 있다.




끝으로, 이 글을 통해 감사를 전하고 싶은 이가 있다. 처음 맞이하는 백수생활에 적응되기까지 다소 위축되었던 나에게 쉬지 않고 용기를 불어넣어준 내 남편, 정말 많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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