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래스의 '아이아스'
우리는 보통 '연극' 하면 대학로에서 애인과 함께 가는 데이트코스의 일부를 생각하게 된다. 극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보통 극작가 하면 셰익스피어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한창 비극, 희극, 그리고 사극을 흥행시키는 동안에도 그의 롤모델은 고대 그리스 극작가들이었다. 그리고 극문학이 처음 탄생했을 당시에는 오락, 예술을 넘어서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다.
연극은 크게 두 가지 장르, 비극("tragedy")과 희극("comedy")으로 나뉜다. '비극'의 어원만 살펴봐도 극문학의 탄생에 대해 많은 걸 추측할 수 있다. 이은 희랍어로 '염소'(τράγος, "tragos") 그리고 '노래'(ᾠδή "ode")의 합성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원래 연극은 종교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염소가 제물로 바쳐질 때 부르는 노래'로 해석한다. 구체적으로 디오니소스제(Διονύσια, 'Dionysia')의 가장 중요한 순서 중 하나가 바로 연극 대회였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향락의 신이다. 포도주는 종교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번이라도 필름이 끊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대인들은 술에 취해서 경험하는 황홀경을 신과 가까워지게 해주는 일종의 영적인 경험이라고 믿었다.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는 상태. 디오니소스가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표현될 때 기본적으로는 남성이지만, 때로는 여성의 유방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 이는 디오니소스를 통해 인간은 신분, 성, 계급 등 여러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게 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상태를 "ekstasis" ("바깥"을 의미하는 εκ, 그리고 "신분" 혹은 "상황" 등을 뜻하는 στασις의 합성어 )라고 부르는데, 이는 영어의 "황홀경" 또는 마약의 일종인 "ecstacy"의 어원이다.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의 가장 직접적인 열매가 바로 배우라는 직분의 탄생이다. 고대 연기자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모두 남성이었다. 사실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연기는 여러모로 되게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었다. 왜냐면, 평민 남성이 무대에서 여자를 연기하거나, 고대 아테네의 경우, 관객석에 앉아있는 정치인이나 귀족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신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다. 배우들이 착용한 가면은 어쩌면 연기자로서의 역할과 신성모독과 같은 애매한 상황으로부터 이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극'은 어떤 장르인가. 보통 '비극' 하면 주인공의 죽음처럼 슬픈 결말로 끝나는 스토리를 생각하기 쉽다. 우선, 주인공이 죽지 않고 우리 기준으로 전혀 비극적이게 느껴지지 않는 비극도 있다. 비극은 관객들에게 다소 무겁거나 철학적 주제를 던지고 이에 대한 고민 하게끔 만드는 연극이다. 예를 들면, 운명, 종교, 정치. 반면 희극은 시민들의 일상 등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재를 다룬 연극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이디푸스 같은 그리스 연극을 읽을 때 역사적 맥락, 특히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많은 비극들이 펠레페네소스 전쟁 중에 작성된 걸 감안하면, 전쟁을 치르던 아테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아테네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의 타당성 등을 시민들이 고민하도록 만든다. 극장에는 투표권을 가진 모든 시민들, 심지어 여성들도 올 수 있었다.
현존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30여 편 정도다(원래는 수 백 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오늘은 그중에서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Ajax Αιας)라는 작품을 소개할 텐데, 지금까지 설명한 '비극'이라는 장르의 특성들이 교과서처럼 녹아들어 있어 '비극'이라는 장르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작품이다.
아이아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영웅들 중 한 명이다. 아킬레스와 함께 그리스 편에서 트로이와 전쟁을 치렀고 아킬레스 못지않은 열정과 힘을 자랑한다. 아킬레스가 캡틴 아메리카라면 아이아스는 헐크 정도?
플롯은 단순하다. 스토리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트로이 전쟁 중 아킬레스가 죽은 후 남은 그리스 영웅들 중 아킬레스의 갑옷과 무기를 누가 차지하게 될지 논의하다가 오디세우스가 차지하는 걸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품은 아이아스는 눈을 멀게 할 분노에 사로잡혀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가축들을 자기 처소로 끌고 가 죽이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 사실이 아가멤논과 다른 영웅들에게 알려지자, 아킬레스의 갑옷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고 만다. 아이아스가 자결한 후,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그리고 아이아스의 아들 칼카스 등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토론을 한다.
플롯만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와닿지 않는다. 현대엔 있을 수 없는 너무나 이질적인 상황이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이 이 연극을 관람한 아테네 시민들도 비슷한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여기서 아이아스는 호메로스가 표현한 그리스의 영웅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가장 유명한 영웅인 아킬레스와 평행을 이루는 포인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일리아스 내내 아킬레스는 아버지 펠레우스에 대한 걱정을 하는데, 노인이 된 펠레우스에게 아들의 위업에 대한 소식이 전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마찬가지로, 아이아스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πεῖρά τις ζητητέα / τοιάδ᾽ ἀφ᾽ ἧς γέροντι δηλώσω πατρὶ / μή τοι φύσιν... / αἰσχρὸν γὰρ ἄνδρα τοῦ μακροῦ χρῄζειν βίου, / κακοῖσιν ὅστις μηδὲν ἐξαλλάσσεται.
"... 아버지에게 아들놈이 비겁한 자가 아니었다는 걸 보일만한 위업을 생각해야겠어... 인간이 이처럼 불행하다면 장수를 장수를 바라는 건 부끄러울 일이다." (Ajax 470~474)
그가 정신을 차리고 가축들을 학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혼자 한 말이다. 이 대사를 보면 아킬레스를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킬레스는 만약에 트로이에서 업적을 남기고,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영광을 선택한다면 죽을 것이라는 운명을 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장으로 뛰어든다. 당시엔 개인의 영광, 명예, 명성(κλέος "kleos")만큼 중요한 게 없었고 이는 내 동료, 나라, 그리고 내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ἢ καλῶς ζῆν ἢ καλῶς τεθνηκέναι τὸν εὐγενῆ χρή.
"영웅은 명예를 안고 살지 못한다면 명예롭게 죽을 수밖에 없다."
(Ajax 479, 480)
그렇다면, 아이아스라는 인물을 통해 소포클레스는 무슨 메시지,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가? 도입부에 오디세우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로부터 아이아스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아테나가 누구냐? 바로 민주주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의 정신과 철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전 날에 무슨 일이 있었나 조사하고 있는 동안 여신이 나타나 스스로 답을 찾지 말고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명령한다.
ἐννέπειν δ᾽ ὅτου χάριν / σπουδὴν ἔθου τήνδ᾽, ὡς παρ᾽ εἰδυίας μάθῃς.
"무슨 이유로 그토록 서두르는지 말하거라, 그리하면 (나로부터)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다" (Ajax 11, 12)
아이아스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명예에 대한 욕망과 정열이다. 반면에 오디세우스는 아테네의 지시를 따르고 후반부에 영웅들 간의 토의를 주도하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중요한 건, 아이아스를 비롯한 호메로스의 영웅적 사고방식과 행동은 지금 현재인 기원전 5세기, 민주주의와 이성으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지는 시대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아테네의 국력이 강해지자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레페네소스 동맹과 아테네를 필두로 한 델로스 동맹 국가들 간의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발발한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강한 함대를 앞세워 에게해 지역을 장악한 아테네의 거만("hubris", ὕβρις)이 원인이다. 스스로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 중 가장 우월하다고 자신만만하게 선포하고 다녔다. 고대 신화와 문학에서 "Hubris"는 정말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인간이 신의 위치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의 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로를 속이고 바람피우고 상처는 줄 수 있어도 대체로 올림포스 신에 모여서 영원한 생명과 쾌락을 누리면서 살고, 지상에 있는 인간에게도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제우스가 겁탈한 처녀와 소년만 몇 명이나 되는가). 오디세우스, 아킬레스, 헤라클레스, 그리고 아이아스 등 영웅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신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킬레스의 행동과 말, 그리고 동료들이 그를 대하는 걸 보면 정말 신과 같다. 하지만 최고의 영웅 아킬레스도 절대로 신들에게는 도전장을 건네지 않는다. 아이아스는 약간 다르다.
소포클레스 전반부에 사자가 아이아스의 부하들에게 그의 소식을 전한다. 일리아스에도 등장하는 아폴로의 예언자 칼카스는 아이아스가 아테나 여신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해준다. 칼카스는 우선 아이아스에게 아테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τὰ γὰρ περισσὰ κἀνόνητα σώματα / πίπτειν βαρείαις πρὸς θεῶν δυσπραξίαις
/ ἔφασχ᾽ ὁ μάντις
예언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선을 베풀지 못할 정도로 커진다면 그는 반드시 신들이 불행을 내려보낼 것이오." (Soph. 758~760)
본질은 인간이면서(ἀνθρώπου φύσιν) 인간 같이 생각(μὴ κατ᾽ ἄνθρωπον φρονῇ)을 하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신들이 심판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칼카스는 아이아스의 반응도 전해준다.
πάτερ, θεοῖς μὲν κἂν ὁ μηδὲν ὢν ὁμοῦ / κράτος κατακτήσαιτ᾽: ἐγὼ δὲ καὶ δίχα / κείνων πέποιθα τοῦτ᾽ ἐπισπάσειν κλέος.
아버지, 그 누구도 신들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 힘을 얻어서는 안 된다지만, 저는 (신의 도움) 없이 이 영광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Soph. 767~769)
소포클레스는 신을 대변하는 예언자의 입술을 빌려, 극장에 모여서 관람하고 있는 시민들, 국내 정책과 군대의 전략을 결정할 수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과연 올바른 결정을 하고 있는가?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레폰네소스 동맹과 전쟁을 하면서, 에게해 지역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아테네가 과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들이 기뻐할 방향으로 과연 움직이고 있는가?
확실히 오늘날 대학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경험일 거 같다.
소포클레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 중 하나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관객들은 오이디푸스가 칼로 자기 눈을 도려내는 장면을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람들은 '아이아스'의 클라이맥스는 자존심 상항 영웅의 자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중요한 장면뿐만 아니라, '아이아스'가 제물로 바쳐야 할 가축들을 학살하는 장면도 안 나온다. 거의 모든 그리스 비극에서 피가 보이는, 소위 액션 씬은 무대 밖에서 이루어진다. 오이디푸스는 눈이 멀어진 채 무대에 다시 올라오고 아이아스는 시신이 돼서 돌아온다.
그렇다면, 그리스 비극의 진짜 클라이맥스는 어딘가? 아이아스가 죽은 후, 그리스의 영웅들, 아이아스의 아들까지 모여서 토의를 펼친다. 안건은 바로 아이아스를 위해 장례를 치러야 하느냐(고대 그리스인들은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면 망자의 영이 사후세계에 가지 못한다고 믿었다).
전시 상황만큼 정부나 국민들(아테네는 정부와 국민들이 사실상 동일하다)이 어리석은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많은 환경이 없다. 소포클레스는 어쩌면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민주주의 정신을 상기시키려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펠리페네 소스 전쟁 중 영웅시대 때나 볼 수 있었던 상식을 벗어난 전략을 자주 취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전쟁사' 제6권부터 시작되는 시칠리아 원정이다. 아테네 함대가 스파르타와 전쟁 중임에도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 섬을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 나치 독일과 똑같은 실수를 범한 것이다. 전선을 이중화시킨 걸 넘어서서 세 배는 키운 거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강경파 정치인이었던 알키비아데스는 다음과 같이 시칠리아 원정을 정당화했다.
...τὴν πόλιν, ἐὰν μὲν ἡσυχάζῃ, τρίψεσθαί τε αὐτὴν περὶ αὑτὴν ὥσπερ καὶ ἄλλο τι, καὶ πάντων τὴν ἐπιστήμην ἐγγηράσεσθαι, ἀγωνιζομένην δὲ αἰεὶ προσλήψεσθαί τε τὴν ἐμπειρίαν καὶ τὸ ἀμύνεσθαι οὐ λόγῳ ἀλλ᾽ ἔργῳ μᾶλλον ξύνηθες ἕξειν.
... 국가는 언제나 쉬고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닳아버릴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경쟁을 경험함으로써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적들을) 무찌르는데 익숙해질 수 있다(Thuc. VI.xviii.6).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휴전 상태였으며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경쟁"(Penguin 영어 버전에는 "conflict", "전쟁")으로 해석된 희랍어는 "agonixomai"(ἀγωνιζομένην, 명사 ἀγων)라는 단어는 영어로 "고통"을 의미하는 "agony"의 어원이다. 또 주목할 점은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을 반대하는 니키아스 장군과의 토의 중에 앞서 언급한 말을 전했다.
앞서 언급한 구절 후반부를 주목했으면 좋겠는데, 알키비아데스는 "지금 모여서 연설이나 주고받고(토의) 있을 게 아니라 작전을 개시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훗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는 어쩌면 아테네의 힘의 원동력으로 보였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극 중 오디세우스가 등장해서 아이아스 시신 문제에 대한 토의를 주도하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다른 신화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지만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총명을 받는 영웅인데,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관객들은 곧바로 영웅의 시대에서 그들의 현재, 아테나 민주주의로 돌아오게 되어, 연극에서 벌어지는 토론과 그들의 나라가 처한 상황과 비교를 하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아이아스와 대조되는 이성과 합리를 상징하면서 토론과 연설 등을 바탕으로 움직여지는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오디세우스는 비록 아이아스와 아킬레스의 유품을 두고 경쟁하던 사이었지만, 아이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올린다.
ὅδ᾽ ἐχθρὸς ἁνήρ, ἀλλὰ γενναῖός ποτ᾽ ἦν.
그는 "비록 적이었지만 고귀한 자였소."(Soph. 1355)
트로이 전쟁을 주관하고, 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 왕은 그리스 군에게 위협이 되었고 신들의 제물을 해친 아이아스의 장례를 반대한다. 장례를 허락하면 자신과 다른 영웅들의 위상에 먹을 칠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오디세우스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ἄνδρας μὲν οὖν Ἕλλησι πᾶσιν ἐνδίκους.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들로 기억될 것이오."(Soph. 1363)
아이아스의 장례를 허락했을 때 돌아올 영광을 근거를 삼아, 모두의 입장을 고려하고 논리적으로 그의 주장을 펼치며, 결국 아이아스의 장례가 결정된다.
희랍어로 극작가를 "Didaskalos"(Διδασκαλὸς)라고 부르는데, 문자 그대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배우와 코러스의 연기를 지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극을 통해 시민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도 분명 포함되어 있는 거 같다. 실제로 소포크레스, 아이스킬로스 같은 자들은 아테네 내에서 현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오늘날 세계의 민주 국가들을 보면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너무 관심이 없는 거 같아 안타깝다. SNS, 가짜뉴스와 소문으로 너무나 파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투표를 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경우가 많아 미래엔 과연 민주주의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게 어쩌면 예술, 문학의 역할일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보는 드라마, 영화, 연극은 당연히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 공감해 주고 마음을 뜨겁게 해야 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 나라를 위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민주 시민으로서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주는 자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