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ribe Jul 19. 2023

그리스를 나은 전쟁 이야기

투키디데스 : 펠레페네소스 전쟁사 

오늘 소개할 작품은 바로 투키디데스(Thucydides/Θουκυδίδης, 460~400 BC)의 '펠레페네소스 전쟁사'다. 이 작품은 기원전 5세기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치러진 펠레페네소스 전쟁(431~404 BC)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미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나 '나폴레옹의 대관식'처럼 한 때 '역사 그림'(History Painting), 말 그대로 중요한 역사적 사전에 담긴 메시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회화가 가장 높은 수준의 미술로 여겨졌다. 개인적으로 가장 대단한'역사 그림'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라고 생각한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회화와 피카소의 파격적인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차이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폴레옹의 대관식'(1807년, 자크루이 다비드 작품, 루브르) 그리고 '게르니카'(1937년, 파블로 피카소 레나소피아 박물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색이다. 황제 나폴레옹에 내리쬐는 햇빛, 그와 요세핀 황후의 옷,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미친 생동감이 느껴진다. '게르니카'는 다르다. 우리는 흑백을 보면 추억, 먼 옛날을 떠올리지만 피카소가 살던 20세기의 흑백은 현재 진행형의 색이었다. 사실 이 그림 어디를 보더라도 나치 독일에 의해 폭격당하는 바스크 마을 '게르니카'의 흔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보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한 현장에 가까워질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결정된 후  미 국무장관 콜린 파울(Colin Powell)이 유엔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었는데 콘퍼런스룸 뒤에 '게르니카' 사본이 걸려 있었는데, 기자회견 동안 그림을 가릴 걸 요구했다. 스페인 내전을 알리기 위한 피카소의 그림은 이제 반전 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이를 둘러싼 새로운 반전 컬처까지 만들어낸 셈이다. 


역사의 역사 

이게 역사와 무슨 상관인가? 일단 고대 문화권 중에서 역사를 체계적으로 민족은 고대 이스라엘, 고대 중국, 그리고 그리스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역사와 신화 간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던 시대였다. 역사는 한 나라, 민족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구성된 문학의 장르다. 그런데 오늘날 과거의 역사적 상황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밝혀내려는 역사학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영어로 History의 어원이 된 희랍어 "Historia"(ἱστορια)는 문자 그대로 "탐구" 또는 "조사"("investigation")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를 보면 페르시아 전쟁이 발생하기 전후 관련 국가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그리스의 지리와 자연환경 등을 조사한 걸 다 기록해 뒀다. 500페이지 넘는 이 책의 절반 이상을 가야 전쟁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영화 '300' 같은 드라마틱한 전투를 기대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사 중 하나로 기억되는 살라미스 해전(Wilhem von Kaulbach 작품) 


그런데, 헤로도토스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스폰서가 필요했는데, 당시 아테네 지배층은 그를 정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야만인들"(barbaroi, βαρπαροι 그리스어를 모르는 페르시아인을 칭하는 포현)을 무찌른 그리스인들의 우월성에 초점을 많이 맞추고 있고, (호메로스의 서사 정도는 아니지만) 신화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승자에 의해 쓰인 역사의 대표적인 사례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처음으로 역사를 서사와 신화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듯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승자를 위한, 낭만으로 가득 찬 내러티브를 전하는 듯하다.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는 자크루이 다비드나 외젠 들라쿠아(Eugene Delacroix)의 그림과 같다.  


반면에, 투키디데스의 역사에서는 낭만 따위를 찾을 수 없다.  아테네 시민인 투키디데스는 애국심 같은 건 다 내려놓고, 펠레페네소스 전쟁의 원인은 신의 섭리나 신화적인 게 아니라 참전한 나라들의 국내 정치, 국익과 복잡한 이해관계 등 철저하게 인간과 사회에게서 찾는다. 작품 어디에도 신화적 요소가 없다. 그리고 명확한 선과 악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 뛰어든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국익 혹은 생존을 위해 싸울 뿐이다. 


포테이다이아 전투를 묘사한 삽화(출처: 위키백과)


투키디데스가 아테네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걸지도 모른다. 펠레페네소스 전쟁은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아이스킬로스의 '필록테테스', '페르시아인들' 같은 그리스 비극의 대표작들이 이때 많이 나오고,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벌써 기존의 그리스 신들과 세계관에 대한 회의감이 많이 나타나고 있던 시대였다. 그리스인들은 간질 환자를 접신의 결과라고 믿었었는데 이 당시에 히포크라테스가 처음으로 이를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질병으로 규명하기도 했다. 철학, 예술, 과학에서도 새로운 관점이 소개되고 있던 혼돈의 시기 속에서 '역사'라는 분야도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역사는 더 이상 신들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위대한 영웅들의 게임도, 선과 악 간의 신성한 싸움도 아니었다. 전쟁은 전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헤로도토스와 극명히 대조되는 '게르니카'인 셈이다.  


세상을 뒤흔든 전쟁 

세계사 수업이나 역사책을 통해서 펠레페네소스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 항상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와 독재 전체주의 국가 스파르타 두 나라 간의 전쟁이라고 배운다. 물론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국력이 강한 나라이긴 했지만, 아래 지도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진행과정 및 참전국가(자료출처 : 위키백과)


이 전쟁은 그럼 도대체 왜 시작한 걸까? 조그마한 도시 국가들이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무찌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다름 아닌 아테네의 함대였다(스파트라의 300 용사가 아니다). 종전 후에도 페르시아 재침공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있어 많은 폴리스는 승리의 주역인 아테네와 동맹을 기 시작했다이들은 군함 혹은 재정으로 아테네 함대에 기여를 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다. 그리고 늘 아테네와의 관계가 다소 불편했던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을 견제하기 위한 펠레페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형성했다.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육상으로 아테네의 영통을 침공하면 아테네는 함대를 파견해 지중해 곳곳에 스파르타의 식민지와 동맹국을 침공하고 어떤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세력들이 있는 폴리스의 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했다. 


붉은색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형성된 델로스 동맹(일명 "아테네 제국"), 푸른색은 스파르타, 코린트 중심으로 구성된 펠레페네소스 동맹입니다. 후반부에는 페르시아까지 개입하게 되는 만큼, 펠레페네소스 전쟁은 그야말로 글로벌 전쟁이었다. 이 전쟁 이후로 지중해 지역은 완전히 달라졌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지금부터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불신과 견제로부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이유, 그리고 그 유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오만(Hubris)

전쟁의 발발,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테네의 가장 큰 원인은 오만('hubris', ὓβρις)이다.  읽다 보면 민주주의의 발원지인 아테네가 오히려 오늘날 중국과 같은 정책을 내세우는가 하면, 북한과 비교되는 스파르타가 오히려 합리적이게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ἡγούμεθα γὰρ τό τε θεῖον δόξῃ τὸ ἀνθρώπειόν τε σαφῶς διὰ παντὸς ὑπὸ φύσεως ἀναγκαίας, οὗ ἂν κρατῇ, ἄρχειν:
(아테네 대표단) 신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교리에 의거하여 힘으로 그대(멜리아 대표단)들을 통치하는 것이 필연적이니라 (Thuc. V.105:6~7)


이 발언을 한 아테네 대표단은 더 나아가 약육강식은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원리(νομος)였다고 주장한다. 아테네의 헤게모니는 신의 은총이다(πρὸς τὸ θεῖον εὐμενείας Thuc. V 105:1). 영어에도 "Might is Right"라는 속담이 존재하는데, 이보다 노골적으로 아테네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그런데, 아테네 지도자들도 이 오만의 위험에 대해서 모를 이유가 없었다.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페리클레스(Pericles)는 이들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째, 여유를 가지고 함대를 관리하라!(ἡσυχάζοντάς τε καὶ τὸ ναυτικὸν θεραπεύοντας)

둘째, 전쟁 중에 제국을 확대하려고 하지 마라!(ἀρχὴν μὴ ἐπικτωμένους ἐν τῷ πολέμῳ)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리스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마라!(μηδὲ τῇ πόλει κινδυνεύοντας)   

결론적으로, 아테네는 20여 년 간 세 가지를 모두 놓치고 만다. 


펠레페네소스 전쟁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가 악명 높은 시칠리아 원정이다. 말 그대로 아테네가 그리스 도시국가 절반과 전쟁 중임에도 함대를 파견해 이탈리아 옆 시칠리아 섬을 정복하겠다는 계획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진주만 기습이나 독일의 소련 침공 못지않게 이해가 안 되는 작전이다. 실제로 스파르타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감이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아테네 재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Thuc. VII.18). 


복원된 아테네식 Trireme, 문자 그대로 삼층 데크로 구성된 함선이다.


원정을 처음 주장했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장군은 이들이 시칠리아를 침공해도 적들은 너무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저항이 거의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Thuc. VI). 현실은 정반대였다. 시라큐스의 헤르모크라테스(Hermocrates) 장군과 스파르타에서 파견 온 길리포스(Gylippus) 장군이 최초로 아테네를 대상으로 해전에서 승리(에피폴라이 해전)를 일궈낸다! 원인은 전력의 차이가 아니라 멘탈의 차이었다. 


헤르모크라테스와 길리포스는 연설에서 아테네는 원래 해상 민족이 아니라 페르시아가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라 주장한다. 시칠리아가 처한 상황은 페르시아 함대와 대적하는 당시의 아테네와 다름이 없었다. 아테네가 이번 원정에 투입한 아테네의 전력을 보면 그야말로 어마어마다 - 함선 100척에 보병 4000명, 기병 300명! 반면 헤르로크라테스가 지휘하는 함대는 35척이었다. 아테네 해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거 자체가 미친 짓이기 때문에 한 번의 승리로 적은 휘청거릴 것이라고 주장한다(Thuc. VII.21). 결과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시칠리아가 승리한다. 패배 후에도 아테네는 여전히 월등히 많은 전력을 보여하고 있었지만, 이 승리로, 바다에서 아테네를 만나기 두려워했던 시칠리아와 시라큐스는 오히려 해전을 환영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시칠리아 원정에서의 실패가 얼마나 참혹했냐면,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군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찾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적과 협상조차 시도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죄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정의(Dike)와 네메시스(Nemesis)(왼쪽) / 1차 아편전쟁 때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 중국 함대를 파괴하는 영국 해군 네메시스호의 모습(오른쪽)

  

καὶ ἡμᾶς εἰκὸς νῦν τά τε ἀπὸ τοῦ θεοῦ ἐλπίζειν ἠπιώτερα ἕξειν (οἴκτου γὰρ ἀπ᾽ αὐτῶν ἀξιώτεροι ἤδη ἐσμὲν ἢ φθόνου)
지금은 신들의 은총에 희망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이제는 그들의 시기가 아니라 연민을 받아 마땅하니) (Thuc. VII.77)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를 경험한 부하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말이지만 그 짧은 문장 안에 아테네는 더 이상 승리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는 듯한 지휘관의 모습이 그려진다. 영어로 오만은 'hubris'라고 하는데 동일한 의미의 희랍어 단어가 어원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오만은 건방지게 행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신의 위치를 넘보는 특수한 마음가짐이다. 인간이 오만한 마음으로 신을 도전하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제우스의 심판을 대행하는 일명 '신성한 복수'(Divine Vengenace)라고 불리는 신이 있는데 바로 네메시스다. 지금도 영어에서 'Nemesis'는 '심판' 혹은 '천벌' 정도의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시칠리아 원정 실패 후, 아테네의 니키아스(Nicias) 장군은 아테네 함대가 마땅히 대가를 치렀다고 한탄한다. 


민주주의의 한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경찰을 자청하면서 아프간, 이라크, 심지어 한국 같이 미군이 싸우는 곳마다 최소 겉으로는 자유민주진영 같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처럼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다른 도시 국가로 전파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늘 스파르타의 경계 대상이었다.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 회원국이 되는 폴리스,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 정권을 수립하려는 폴리스도 굉장히 많았고, 아테네는 함대를 보내어 이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해군력 못지않게 아테네를 초강대국 진열로 올려준 중요한 요인임과 동시에 아테네의 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은 아테네 제국의 붕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종말을 알린다. 


독자가 보더라도 민주주의의 한계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정말 많다. 시칠리아에서 패배를 겪은 후 니키아스 장군은 아테네 민회에 지원군을 파견하던가 철군 명령을 내릴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제국주의적 성향의 아테네 민회는 투표 결과가 아니면 절대로 철군을 승인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염증을 드러낸다. 지금 현장에서 실제로 전투를 하는 군사들과는 달리... 


ἀλλ᾽ ἐξ ὧν ἄν τις εὖ λέγων διαβάλλοι, ἐκ τούτων αὐτοὺς πείσεσθαι.
(민회는) 그럴듯한 연설 따위에 넘어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도록) 설득당할 것이다. (Thuc. VII.48)


실제로 니키아스는 처음부터 원정을 반대했었고, 민회는 알키비아데스의 현란한 말솜씨에 정신을 잃고 출정을 결정하고 만 것이다(당시 알키비아데스는 '전시 중이지만 강국은 큰 야망을 가져야 느슨해지지 않는다'와 비슷한 논리를 주장했다 / Thuc.VI). 설령 철군이 승인된다 하더라도, 민회는 니키아스가 철군 투표를 얻어내기 위해 뇌물 공세 같은 어처구니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날 거라고 예상하여 자기는 차라리 시칠리아에서 전사하는 나을 수도 있다고 얘기할 정도다. 



아테네 폴리스부터 해군의 모항인 파이레스(Piraeus)까지 이어지는 장벽(출처: 미 육군 / US Army Cartographer)


아테네의 가장 큰 비극은 민주주의에 의해 나라가 스스로 자멸해 버렸다는 점이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성벽 안에 전염병과 함께 갇힌 채 스파르타와 동맹국들과 싸우고 있었다. 전쟁 후반부에 동맹국들도 아테네에 대한 신뢰를 잃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 틈을 타 파이센더(Pisander)라는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 정권을 무너뜨리고 과두 정부를 설치한다. 나라를 완전히 장악한 새로운 정권은 스파르타와 협상 모드로 돌입하고, 항복하는 조건으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성벽을 모두 허문다. 전쟁의 결과, 아테네는 성벽뿐만 아니라, 해외 식민지, 그리고 함대까지 모두 잃고 강제로 스파르타의 '우방국'이 되고 만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이 과두 정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민주 정권이 다시 수립된다. 기존의 민주 정부에서는 모든 정책이 민회 그리고 이를 보좌하는 500인회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제는 민회가 아테네의 헌법의 관할 아래에 놓이게 된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해도 '헌법'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펠레페네소스 전쟁을 통해 말 그대로 군중들에 의한 정치(Democratia / δημοκρατια)에서 법치주의 사회로 전환해서 오히려 지금의 민주주의에 가까워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죽었지만,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 셈이다. 


투키디데스의 역사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처음 완독했을 때 굉장히 강한 여운이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많은 고전을 읽어봤지만 투키디데스의 글처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세밀한 수 싸움과 복잡하게 얽힌 외교관계, 페리클레스와 같은 영웅들의 연설 등 현대판 정치 스릴러를 보는 듯하다.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거다. 재미있다! 


이 외에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데, 오늘날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국가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게 되었다. 완벽한 국가관이나 정부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지만,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는 거 같다. 다음 구절은 니키아스 장군이 시칠리아에서 사기가 바닥을 치는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한 연설에서 발췌한 것이다. 


 ἄνδρες γὰρ πόλις, καὶ οὐ τείχη οὐδὲ νῆες ἀνδρῶν κεναί.
국가는 성벽이나 승조원도 없는 군함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다! (Thuc. VII.77)


고대 그리스에선 군인들은 모두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창과 방패, 그리고 갑옷을 사비로 마련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보병 하나, 하나는 너무나 귀했다. 반면에 아무리 가난한 아테네 평민이라도 군함에서 노는 누구나 저을 수는 있었다. 정말로 평범한 시민들의 힘이 전쟁터에 투사되는 셈이다. 


아테네의 군함 승조원처럼 온 국민들이 마음을 모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만들어지는 날을 꿈꾸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소개를 마칩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이라는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