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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ibe Mar 06. 2022

안녕? 평화!

성서가 말하는 평화란? 

"안녕하십니까?" 

서로 알든, 모르든, 거의 기계적으로 나오는 한국인의 가장 기본적인 인사말이기 때문에 "안녕"이란 말이 우리 고유어가 아닌 한자어라는 걸 알았을 때 적잖게 놀란 기억이 있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말 그대로 상대방이 지금 상태가 "안녕(安寧)"하신 지, 아무런 탈없이, 몸과 마음이 건강히 계신지 물어보는 말이다. 


다른 언어들의 인사말을 살펴보더라도 상대방의 무탈함, 안녕을 확인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를 비롯한 라틴어 문화권에서 가벼운 인사말인 "salut"는 중세시대 때 건강, 혹은 무탈함을 뜻했다. 이는 영어로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는 혹은 경례를 뜻하는 "salute"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는 "salut"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동료의 행복과 평탄함을 기원하는 "건배"의 뜻이기도 하다. 중국어의 "니하오(你好)"도 유사하다. 2인칭 대명사인 너 니(이)와 좋을 호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안녕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여러 문화권의 인사말을 보며 인간에게 "안녕", "평화"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제일 먼저 하는 말이니 우린 또 대부분 문화권이 "평화"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도 알 수 있다. 아무런 탈이 없는 상태, 몸은 병이 없고 마음속으로도 짐을 지지 않은 상태. 즉, 문자 그대로 "well-being"을 뜻한다. 외교, 국제관계라는 거시적 관점에서도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기독교 하면 보통 서양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성서는 그 기원을 유대인들과 고대 이스라엘에 두고 있다.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의 인사는 "샬롬"(שָׁלוֹם)이다. 교회를 한 번 정돌 가본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것이다. "샬롬" 역시 히브리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인사로서의 평화

구약성서 통틀어서 "샬롬"이 209번이나 언급된다. 이 외에 샬롬과 같은 어원인 "샬렘"(שָׁלֵם)까지 포함하면 300번이 넘는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여느 문화권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청년(야곱)이 종들에게 자기 외삼촌의 안위를 물어볼 때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샬롬"하냐' 이르되 '"샬롬"하니라' 
-창세기 29:6-


유대인들의 신, 야훼가 인간 앞에 등장할 때도 동일하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야훼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기드온이라는 사람 앞에 나타났을 때 한 말이다. 유대인들은 신을 눈으로 보면 죽는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야훼는 공포에 떠는 그의 종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나 보다. 

여호와께서 그(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는 "샬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사기 6:23-


외교적인 의미로서 "샬롬"도 성서의 문화 속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자신들의 땅이 없었던 유목 민족이어서 이들이 정착할 땅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치러왔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샬롬"이 있었더라.
-사무엘상 7:14-


비록 국가 간의 문제에 대한 외교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건 아니지만, 고대 유대인들 역시 전쟁의 부재를 뜻하는 평화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공유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는 동북아, 유럽권과 여러모로 유사한 양상의 평화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기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샬롬"의 히브리어 어원을 더 깊숙이 파고들면 성서적 평화가 무엇인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행위로써의 평화

"샬롬"은 형용사로 쓰이는 경우네는 "완전한"이라는 뜻이 있다. 양적, 그리고 질적으로도 완전한, 완성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 단어가 "샬렘"(שָׁלֵם)이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샬렘"은 "샬롬"의 동사형으로 "완성시키다", 더 나아가 "회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성서 전반부 5권의 책들을 흔히 "율법"(Torah, תּוֹרָה)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게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규율들이 수 백개 기록되어 있다. 이 규율들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유목 민족이었을 때 생겨난 것들이라, 이웃과 가축에 대한 갈등이 생겼을 때 대비한 법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웃에게 빌려온 것(나귀, 소, 양 따위 짐승)이 그 임자가 함께 있지 아니할 때 상하거나 죽으면 반드시 "샬렘"하려니와 
-출애굽기 22:14-


여기서 "샬렘"은 내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문자 그대로 배상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어쩌면, 유대인들에게 평화는 관계의 회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간의 다툼, 갈등이 해결되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샬롬"이 있었다. 즉, 훼손된 정의가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피해를 보상하는 것과 더불어, 내가 받은 피해를 상대에게 되갚을 수는 있는 건가? 놀랍게도 성서는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신, 야훼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골리앗을 무찌른 이야기로 유명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에게 역적으로 낙인찍혀 그로부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성서에는 다윗이 도망하던 중, 그를 쫓다가 잠들어 있는 사울 왕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들의 만류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그의 창을 가져가 다음 날 아침에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사울은 다윗이 한 일을 깨달았을 때 다음과 같이 다윗의 의로움에 경의를 표한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샬렘"하기를 원하노라
-사무엘상 24:19-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제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사울의 외침에는 다윗의 야훼는 선행에 대해 반드시 보상할 것이다는 뜻이 담겨있다. 주목할 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는 이유다. 분명 사울이 야훼가 선택하고 임명한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이다. 사울이라는 인간에게 선행을 베푼 것과 동시에 그의 신, 야훼의 명령을 지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울은 자결하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가장 중요한 왕으로 역사가 기억하고 있다. 

King David Playing the Harp, Gerard van Honthorst <출처:위키백과>


다윗의 입장에서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사울을 제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내러티브를 통해, 성서에서 평화는 나의 안녕(安寧)을 위협하는 것을 제거하거나, 고난과 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 그리고 신의 계명을 신뢰하는 상태라고 알 수 있다. 



견고한 성벽과 같은 평화

성서적 평화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마지막 사례를 하나 살펴봤으면 한다.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나치 독일은 물론이고, 이들은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에 자신들의 기원을 찾는다. 결정적으로 다윗과 솔로몬 때 전성기를 누린 이스라엘 왕국은 바벨론의 속국이 되고, 이스라엘의 귀족과 왕족들은 바벨론 제국 각지에 포로로 잡혀간다. 이를 이스라엘의 역사 중 "포로기"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바벨론의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소수민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기"가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예배의 중심지인 야훼의 성전과,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했다. 

키루스의 칙령이 기록된 키루스 실린더 <출처:위키백과, 대영박물관>


예루살렘의 성벽이 재건되었을 때 엄청난 영적 각성이 있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성벽이 완성되었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일 만인 엘룰월(月) 이십오일에 "샬렘"하매
-느헤미야 6:15-


조선의 남한산성처럼, 한 나라의 성벽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성벽에 빈틈이 있다면, 외세들의 침입에도 취약할뿐더러,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멸망한 이유가, 야훼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인들의 신을 숭상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들에게 성벽은 한 마디로 외교적, 군사적 경계선임과 동시에, 이들이 신의 선택된 백성임을 나타내는 영적인 경계선이었다. 


성서는 어쩌면 진정한 평화는 어떠한 공격에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이 성벽과 같은 것임을 가르치는 듯하다. 평화는 적의 공격, 역경과 고난의 부재가 아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신을 신뢰하고 그의 규율을 지키고 신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뜻이다. 



대부분 현대인들에게 평화라는 말보다는 "안정"이 더 와닿을 수도 있다. 재정에 대한 불안이 없고 누군가의 강요 없이 나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상태. 


얼마 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데, 사실 전면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엄청난 긴장과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전쟁이 없어도 얼마든지 두 국가 간의 관계가 불안할 수 있는 거처럼, 계속 어려움을 피해 다니는, 어려움이 없기 위해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이 과연 얼마나 안녕(安寧)할지 고민이 든 적이 있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다윗 왕처럼 어려움을 제거하거나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나 자신을 믿고 더 큰 것을 추구하는 삶을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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