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의 행복을 결정지을 수 있을까
발리엔 정말 떠돌이 개가 많구나,
했는데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었다.
제주도에는 떠돌이 개가 정말 많다.
떠돌이 개만 못한 인생 같아 보이는 개들도 많다.
짧은 쇠사슬 줄에 묶여 마당 한편에서 산책 한번 못 가보고 사는 개들 말이다.
한두 주전,
출근길에 버스정류장을 향해 빌라 1층 주자창을 지나고 있었다.
딴생각에 잠겨있던 내 뒷발에 툭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별생각 없이 한 발을 더 내딛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그제야 어랏, 하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비현실적으로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거기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발을 툭툭 치고 바짓단을 물고 늘어지는 걸 보니 걸을 때마다 내 발을 따라온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의 발을 따라다녔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
아직 아기 같아 보이는 명백한 믹스견,
나는 보는 순간 그 개에 사로잡혔다.
지나가는 개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쳐다보는 카르마가 있는(;;;) 나였지만,
삼사십 분에 한 대 지나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자꾸 붙드는 그 애를 떨쳐버리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거기까지 따라온 멍멍이는
그곳에서 새로 만난 학생에게 가서 좋다고, 깽깽 발을 서고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가 버스에 올라타자 개가 버스 옆을 휙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따라 뛰었다.
버스기사님이 빵빵 댕댕이를 향해 경고음을 줬다.
아직 차가 무서운 걸 모르는 아인가 봐, 얼마 전 신고한 유기견 로드킬 때문에 마음이 더 쓰였다.
아르바이트 후 집에 돌아오는 길,
막연히 빌라 앞에 그 아이가 아직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차장은 고요했다. 며칠 그 개가 동네 어귀에 나타나진 않을까, 오랜만에 누군갈 보고 싶은 감정을 느꼈다.
거센 태풍도 한 차례 지나가고, 떠돌이 강아지 한 마리쯤은 어느새 잊힌 어느 날,
퇴근길, 집 앞 골목에 그 강아지가 있었다. 밭 둑에 서서 밭에 내려가고 싶은지, 밭에서 고양이라도 보았는지, 밭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반가워라.
나는 가지고 있던 식빵 조각이라도 나눠주고 싶어 강아지를 불렀다.
나를 발견한 개는 신나게 뛰어와 팔짝팔짝 뛰며 바지에 흙 발자국을 꾹꾹 새겼다.
빵을 주고 빌라까지 따라오는 개를 두고 집에 들어온 나는
강아지가 눈에 밟혀 햇반 플라스틱 그릇에 물을 떠 내려갔다.
녀석은 주차장에 있다가 주는 물을 몇 번 마시더니 그릇 귀퉁이를 물어서 물을 다 쏟아버렸다.
그리곤 그릇을 신나게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귀엽다...
나는 동참했다.
원반 던지기처럼 햇반 그릇을 던져줬다.
몇 분 신나게 논 우린 헤어졌다. 나는 개를 남겨두고 쿨하게 혼자 작별인사를 남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놀랍게도 댕댕이가 주차장에 그대로 있다..!
너 여기서, 잔 거니..?
그제야 어라,
난 걱정과 부담과 심란함에 마음이 요동쳤다.
나 너 책임져야 하는 거니..?
오늘도 버스정류장에서
그 애 배웅을 받으며, 떠나온 나는
휘몰아치는 생각들에 혼란스러웠다.
1 키운다? 둘이 사는 빌라에? (흠) 남편이 설득이 될까? (아니)
무엇보다 우리 수입으로? (밥값도 불가능)
개에게 생활을 맞출 마음의 준비는? (...)
안된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빵을 줘서는 안 됐다,
내가 놀아줘서는 안 됐다,
책임지지 않을 거면서 사랑을 줘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미 되돌리긴 늦은 듯 보였다.
퇴근 후 돌아온 주차장 한쪽에 그 아이가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나는 모질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동문에 비친 댕댕이를 훔쳐보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나를 따라 자동문을 들어오다 서서히 닫히는 문에 끼어본 이후, 그 앤 문 앞에서는 멈춰 기다린다)
잠이 덜 깬 녀석이 기어이 쫓아와 문 앞에 다시 엎드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창 밖으로 내다보니 문 앞에 엎드렸다 누웠다 하는 멍멍이가 보였다. 계속 눈에 밟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창밖만 내려다봤다.
안 되겠어서 유기견센터를 검색했다.
2 제주도 유기견보호센터에 연락한다? (검색 중)
‘안락사 1위 불명예 제주 유기센터 왜?' (터치)
기사 내용에 따르면,
대게 육지 온 이들이 이곳에 개를 버리고 간다고 생각됐지만,
실상은 원정 유기는 거의 없다고.(아니 생각해보면, 누가 힘겹게 여기까지 개를 데려와서 버리겠는가! 그만한 애정이면 사실 키우는 게 낫지 않을까, 입양을 보내거나)
아직 반려견에 대한 인식이 낮은 이곳에선
개는 가축이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목줄 없이 풀어 키우는 개들도 많아 이들을 유기견으로 오해해 신고하는 관광객도 있다고.
떠돌이 개 대부분이 믹스견인 걸 보면, 사뭇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간다.
시설 규모에 비해 유기견 접수가 포화 상태인 보호센터는
신고 접수 후 약 일주일을 주인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보호했다가,
다시 약 일주일 정도 새로운 주인을 찾아 입양되길 기다린 후, 대부분 안락사시킨다고 한다.
제주에서 유기견과 가족이 된 친구 역시
유기견센터에 신고는 추천하지 않았다. 대부분 안락사된다고 했다.
이런 실정이니 사실 길거리 개를 우리가 어찌할 '좋은' 방법은 없어 보였다.
3 그래도 사람을 너무 잘 따르는 걸 보아 사람 손을 탔던 멍멍인 것 같았다. 주인이 있진 않을까?
제주 동네 커뮤니티에 주인을 찾는다는 내용을 올렸다.
고맙게도 한 분이 마당이 넓다며 임시보호를 맡겠다는 댓글을 남겼다.
다음날 전화하기로 했지만 그분의 맞춤법 - ~읍니다-가 마음에 걸린다.
(실제로 통화해보니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는데, 주인이 없어 보인다고 하니 오래 맡아주시기엔 몸이 아프시다고 했다, 새 주인 찾기도 실패)
헌데 내가,
한 개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을까?
천진난만하게 동네를 탐방하며 다니는 생후 3개월도 안되어 보이는 저 개를
주인을 찾아준다는 명목 아래,
케이지 안에 넣을, 목줄을 채울, 권리가 내게 있는 걸까? 그에 합당한 책임(병원 검진을 받게 해 준다거나, 목욕을 시켜준다거나, 임시보호를 맡는다거나)은 부담스러워하면서,
그 애의 인생에 끼어들어도 되는 걸까?
떠돌이 개,
그들에게 어떤 삶이 행복할까?
교통사고나 병균, 질병, 위험한 시설, 자연재해 등에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인생(사람이나 다른 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전재하에) vs 비바람과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락할지 모르나 좁은 케이지 안에서 죽음 혹은 행복의 양갈래에서 결단을 기다려야 하는 인생(새 주인이 행복일 거란 확신이 100%는 아닐지라도),
두 개의 극단에서 그들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개들은 어떤 인생을 결정할까?
떠돌이 개가 행복하지 않을 거란 건 내 간단한 생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렁이를 빌라에서 떼어낼 요랑으로 데려나간 바닷가 풀숲에서 노즈 워크 하는 모습, 배에 바닷물을 잔뜩 묻히고 와서 털어내는 그 애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쇠사슬에 묶여 내가 지나갈 때마다 왕왕 짖거나 무기력하게 누워 눈만 꿈벅거리는 우리 동네 개들에 비하면 누렁이는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어 보였다.
개는 주차장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문제는 주차장에 머무는 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다.
누런 털을 가진 개의 모습 위로, 브라운 색 털을 가졌던 나의 이전 반려견을 자꾸 교차시키는 나를 발견했다. 대학교 졸업 무렵 즈음 친구에게 새끼 코커스파니엘을 입양받았다. 덜컥. (혼자 입양 결정을 다 한 후) 엄마에게만 통보하듯 허락을 받았고,
아빠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채, 개를 안고 집에 갔다. 방에 숨겨 데리고 있다 아빠에게 금방 들통이 났다.
그렇게 시작된 개 키우기는 엉망이었다. 지금처럼 강형욱 아저씨가 없었던 시절, 나는 개는 그냥 같이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였지, 거기에도 공부가 필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언니의 책상에서 본 <코커스파니엘 키우기> 책을 보고도 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육은 언니의 몫, 뒤치다꺼리는 엄마의 몫, 나는 아빠로부터 그 애를 보호하고 내가 필요한 만큼 사랑을 주고 위로를 받으면 그만이었다.
아침이면 가족 모두 일을 나갔다. 그 애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혼자 있었고,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을 혼자 짖으며 시간을 보냈다. 산책은 일주일에 한 손가락에 꼽히게 했다. 코커스파니엘(사냥견)이 말이다!
모든 것 물어뜯고 엄청난 에너지를 자랑하는 아이를 감당하기에 가족들은 언제나 지쳐있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개를
다시 찾으러 나서지 못한 무책임한 나는 부모님을 원망했고, 당시 시집갔던 언니를 원망했다.
마음 한편엔 그 애를 당당히 찾아와 내 힘을 키울 자신이 없던 내 무기력함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를 탓하는 나 자신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강형욱 아저씨가 TV에 나오는 걸 보고, 볼 때마다 매번 울었다. 내가 그 아이의 인생을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 주인이었는지, 내 무책임에 경악했고, 내 무지에 경악했다. 다시는, 환경적 조건과 단단한 마음의 각오가 되지 않는 한, 반려견을 키워선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게 그 아이에게 진 빚을 갚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십 년이 넘었지만, 그 개는 내가 지키지 못한 존재로,
언제나 내 무책임과 나약함을 아프게 건드리는 나의 취약점이다.
이틀 만에 정이 든 떠돌이 개에게 나는 나의 약점을 덧씌우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나는 과도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저 아이가 누굴 물면 나에게 책임을 물면 어떡하지, 저 아이가 저기 계속 있는다고 나를 찾아오면 어떡하지, 그게 무서워 나는 자꾸 눈에 밟히는 녀석을 힘겹게 모른 척했다.
다 내가 만든 불안이었다.
멍멍이가 나 때문에 빌라 주차장에 있을 거란 생각도 오해일지 몰랐다. 이 존재를 신경 쓰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다.
다음날 아침,
밤 사이 녀석에겐 종이 박스에 수건이 깔린 집이 생겨 있었고,
잘게 썬 채소가 섞인 밥이 가득 든 제대로 된 밥그릇이 생겼다.
내가 물을 떠다 준 햇반 그릇에는 깨끗한 새 물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퇴근 후,
당연히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댕댕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을을 돌며 찾아보고 빌라에 돌아오자 한 부부가 개를 찾고 있었다.
병원에 데려가려고 왔는데, 개가 없어져 찾는 중이라고 하셨다.
개나 사람이나
모든 존재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 사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 것이다.
누렁이는 누렁이 인생을 살게 두면 된다,
이게 나와 주변인들이 내릴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개 존재를 소유물처럼 대하던 시대에서 이제 겨우 '반려'견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혀가는 한국,
그리고 인식의 변화가 좀 더 더딘 이곳, 시골마을에서 유기견이 된 후 보호하기 이전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은 확실하다.
*개인적으로는
개를 키우기 위한 테스트가 있어야 하고,
개체수 번식을 위한 규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꿈같은 얘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