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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lionheart Sep 19. 2023

<fade out>

우리 단지는 타 단지보다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다. 한참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세대들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특히나 우리 동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이 여럿 있다.


우리 집도 그런 경우였다. 아래층의 머릭카락이 하얗게 세다 못해 회색빛이 도는 할머니 한 분과 우리 엄마는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 단지 안 화단 쪽으로 걸어가시며 담소를 나누곤 했는데, 그 이야기의 주된 소재는 불효막심한 딸년인 나에 대한 얘기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집 안팎에서 엄마가 나를 힘들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저렇게 험담까지 하고 다니나 했었더랬다.


그때 엄마는 이미 인지기능 저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분가한 이후 처음으로 맞는 올해 5월 어버이날 전 주에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가 있었다. 엄마 아빠를 차에 모시고 식사 장소로 이동하려고 부모님 댁 앞 차를 세웠을 때,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엄마의 눈빛을 보았을 때, 초점이 없다는 게 저런 거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 안 하시고, 손녀딸이나 나하고도 눈 한번 못 마주치고. 사위도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헤어질 때 잠깐 눈빛이 현실세계로 돌아온 듯 보이더니 갑자기 남편한테 “잘 먹었습니다~.” 하시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는데, 그 인사가 마치 옆집 아저씨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여전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듯했다.


그 회색 머리의 할머니는 작년에 갑자기 5층인 할머니 집과 8층인 우리 집이 헷갈려서,  우리 집 문을 강제로 열려고 두 번이나 시도하셨더랬다. 그것도 한 번은 귀가하는 딸아이와 문 앞에서 마주쳐서 여기 저희 집이라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도어락을 열려고 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그 댁 자제분이 미안하다고 간식거리를 갖다 주면서 사과를 하러 오기도 했었다.


얼마 전에 십몇 층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을 오랜만에 일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분도 팔순이

훨씬 넘어 보이시지만, 그 연세에도 훤칠한 키에 항상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계셔서 당당한 폼새를 자랑하시는 분이셨다. 마침 마스크를 쓰고 계시길래, 인사말 겸해서 "요즘 다시 마스크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쓰고 다녀야 하는데.." 하면서 웃으면서 눈빛을 교환하려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할머니와 그분 따님과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년 동안 인사를 나누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분은 그 순간에 내 말이 안 들리는 듯했고,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찰나에, 엘리베이터에서 그분 따님이 내리면서 인사를 하다가 할머니 쪽을 보면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분을 다시 뵈었을 때는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인생무상(人生無常)


특히나 생애주기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estrogen)의 조절을 받는 여성의 인생이 더 그렇게 다가온다.


사랑, 헌신, 혼돈, 분노, 상실,

그리고

무(無)..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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