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야기
내 동생은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나는 인생에서 나름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각 결정들의 장단점을 엑셀로 표를 만들어 저서 장점과 단점을 비교해 보곤 하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동생이 단호히 한마디 하였다.
"언니, 매몰 비용은 기회비용이 아니야."
나는 그때 매몰비용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매몰 비용에 대해서 찾아보고 나서야 내가 나름 합리적인 근거로 판단하였던 여러 일들이 추후 가장 최선의 선택이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회비용은 나 같은 뼛속까지 이과생도 자주 들어 본 말이다. 사람의 시간과 재화는 결국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선택지를 가능하게 만들 순 없다. 결국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데, 이때 포기된 기회가 갖는 가치를 기회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생 방학 때 한정된 재화와 시간으로 유럽여행을 갈 수도 있고, 국내에 있으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배우고 싶은걸 배울 수도 있다. 만약에 유럽여행을 택한다면, 아르바이트로 인한 소득과 영어 실력 등이 기회비용이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매몰 비용은 무엇인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이 매몰 비용이다. 실제 기업에서는 광고 비용이나, R&D 비용 등을 의미한다. 사실 매몰 비용 오류는 도박 등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이미 내가 도박으로 쓴 돈은 무슨 일을 해도 회수할 수 없는 돈이며, 이미 지출해 버린 돈과 내가 돈을 딸 확률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소위 말하는 본전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생각보다 사람들이 매몰 비용과 기회비용을 헷갈린다. 나조차도 그랬다. 내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나는 공부하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공부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분야의 지식이 늘어나는 게 즐거웠고,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게 즐거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교직에 있고 싶었다. 교직에 있고 싶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시간을 더 들여 학위와 전임의 과정도 진행하고 실제 교직에도 있었다. 다만 의대 교수는 다른 단과대학 교수랑은 달라서 연구와 지도 이외에도 진료의 의무가 있다. 이 진료에 응급실까지 추가되면 생각보다 정말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해야 했다. 대 코로나 시대에,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모두 겪었던, 반복되는 자가 격리와 기관 폐쇄를 겪으면서, 더 이상 내 삶에 균형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코로나도 언제가 끝나겠지만, 아이가 크는 것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도 언제가 끝난다. 아이가 항상 나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벌써 우리 첫째는 화가 나면 방문을 닫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내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동생과 대화하던 중이었다.
"언니가 생각하는 교수로서의 명예와 가치, 가족 간의 시간이나 아이들의 성장은 서로 기회비용이지만, 그동안 이미 언니가 들인 시간은 매몰 비용이야. 언니가 학위 하는데 쓴 돈, 시간 등은 이 결정에서는 고려 대상이 아니지."
내가 학위 하는데 들인 돈이 었으면, 아이들 영유도 보냈고, 외제차도 뽑았다. 내가 전임의 하는데 들인 시간 동안 일을 했으면, 호주산 소고기를 먹을 때 한우를 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 학위는 내 입장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가치다. 하지만 냉정히 한발 물러 생각해 보자. 저것들은 이미 과거에 다 벌어진 일이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선택을 하든 회수할 수 없다.
매몰 비용을 배제하고 고민하자 답은 어렵지 않게 보였다. 내가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사실 어떻게 살아도 후회가 된다. 내가 한 60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하면 긴 시간 동안 무엇이 되었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애매하게 적당히, (정형외과를 선택한 이유에서도 한번 언급한 바가 있지만 난 애매한 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애매하고 적당한 인생을 사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힘든 일이다.) 내가 5년 뒤에 죽는 다고 생각했을 때 남아 있는 삶을, 그리고 지나온 삶을 후회하지 않도록 살고자 마음먹었다.
우리는 에피메테우스의 후손인지라 항상 나중에 생각하고 지나간 선택을 반성하게 된다. 하지만 고민하고 후회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엔 좀 더 나은 선택을 내려 보고자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인 인간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아이들과 천문대에 다녀왔는데, 정말 사람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이고 나의 고민은 정말 더 작은 티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리프레쉬가 필요하신 분이라면 천문대에 한번 가보시는 것도 추천드린다.)
작년에 일을 조금 쉬면서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했다. 다만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환자들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하며 얻는 즐거움과, 내가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석적인 치료를 하며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다는 보람이었고,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재작년 겨울, 내가 삶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지쳤을 때 의미 있게 봤던 드라마 대사를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드라마 "눈이 부시게" 마지막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