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르 게임, 나는 무엇일까요?

munto 거기서부터 쓰기 2018 겨울 시즌 1주차 : 곤도르 게임

by 김현승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을 하나 고른 뒤, 그 사물을 글로 표현해 봅니다. 사물의 입장에서 1인칭 이야기를 쓰는 것도 가능합니다. 글을 쓴 후 듣는 사람들은 그 사물이 무엇인지 맞혀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봄, 여름보다 가을, 겨울을 좋아해요. 특히 가을엔 정말 살아서 숨을 쉬는 것 같아요. 쌀쌀해진다고 다들 움츠러들지만, 저는 오히려 컨디션이 좋아져서 바깥 활동이 많아지기 시작하거든요. 날씨가 너무 더울 때는 까칠한 가시가 더 까칠하게 돋아나는 것 같아요. 아, 드디어 가을이에요. 지난여름 연일 폭염 신기록을 세우는 날씨 때문에 어찌나 힘들던지, 이러다 정말 딱 죽겠구나 싶었는데 9월 말쯤 되니 바람도 불고 하늘에 익숙한 구름들도 좀 보이고, 드디어 여름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사실 절 깨운 건, 며칠 전에 저를 찾아 왔던 어린 아이들이었어요. 헤어스타일이 꼭 저와 닮아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곧 입학할 중학교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소리가 들려서 초등학교 고학년 남자아이들이란 걸 알 수 있었죠.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걸 보니, 역시 그 나잇대 남자아이들의 에너지는 아무도 당해낼 수가 없겠다 싶었어요. 큰 소리로 숨도 안 쉬고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어요. 중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데 그럼 잔소리하는 사람도 과목 수만큼 늘어나는 거 아니냐, 6학년쯤 되니 축구공만 들고 운동장에 나타나면 어린 애들이 알아서 비켜줬는데 이제 중학교 들어가면 3학년 형들 눈치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니 짝꿍 연이는 말도 한 번 못 붙이게 새침데기였어도 같은 중학교 가서 교복을 딱 입으면 무조건 고백할 용기가 생길 거다 하는 이야기들이 귀엽고 귀여워 한참을 흐뭇하게 바라봤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연이 짝꿍이라는 녀석이 저를 가리켰어요. ‘찾았다!’ 하도 크게 소리를 지르길래 하마터면 혼자 땅으로 툭 떨어질 뻔했어요. 알아봐준 게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했는데, 그래도 잠시나마 절 따뜻하게 해 준 아이들이 절 알아봐주었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행운이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녀석들은 내 집을 있는 힘껏 흔들고, 두들기고 한 30분쯤 티셔츠가 땀으로 폭 젖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어요. 저를 위해서요. 한 녀석이 말했어요. 축구할 때 형들 눈치 보는 거 싫다고 말했던 그 녀석인데,

“다른 거 찾자, 여긴 안 되겠어.” 이러는 거예요.

저는 외쳤어요.

"끈기 없는 자식, 딱 한 번만 더 해봐. 내가 그냥 내려가 줄게."

제 목소리를 들은 걸까요? 아까 과목 수만큼 잔소리 늘어날까봐 걱정했던 그 녀석이 온 몸을 날려 우리집에 쿵! 하고 부딪쳤어요. 이때다 싶었어요. 저는 아직 잠꼬대중인 제 친구들까지 붙들고 몸에 힘을 꽉 주었어요. 인생에선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한 거라더니, 제가 스스로 힘 줘서 떨어진 거 티 하나도 안 나고 자연스럽게 떨어졌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까 다른 거 찾자던 바로 그 녀석이 잠자던 제 친구들까지 깨워 씩 웃고 있었어요. 성공했구나, 하는 순간 몸속까지 시원하게 느껴지는 가을바람 때문인지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입고 있던 가시 옷을 벗어버렸거든요.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취해 잠깐 어지러워하고 있었는데,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비몽사몽간에 들렸던 말소리가 기억나요.

“쨈을 만들어볼까?”

“빵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마트에서 사온 거하곤 차원이 다른 맛일 거야.”

“조심해야 한다, 손 다쳐.”

“나 이거 잘 구워서 할머니 보여드릴래, 이거 내가 딴 거라고 자랑해야지.”

그 녀석들을 만난 다음부터는 저의 모든 순간이 따뜻했어요. 제가 막 어른이 되었을 때는 괜히 가시를 힘 줘서 세우고 센 척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사람들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걸 이야기할 때 제 크기만하다고 놀리는 것, 진짜 불쾌했거든요. 그런데 역시, 시간은 위대한 것 같아요. 눈에 띄게 키가 크거나, 화려한 겉모습은 아니더라도, 가을이 오니 저는 속이 꽉 차서 단단해졌어요. 그래서 가시에 힘주면서 오버하지도 않고, 화날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날씨가 조금 더 추워지면, 저를 가까이 하기만 해도 웃음이 날 거예요. 남녀노소 누구하고나 친해질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절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숨어있어요. 그렇지만 저를 찾아준 녀석들처럼 기꺼이 저를 들여다봐 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구워삶아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조금 딱딱해 보인다고 오해 말아요. 조심해서, 잘 껍질을 까주기만 하면 당신을 달달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나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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