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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Aug 10. 2021

표현 과잉의 시대, 편지로 하는 찐소통의 장에 초대받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이슬아와 남궁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


  책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자꾸 늘고 있는데 읽으려는 사람은 줄어드는 이상한 변화를 감지한 지 몇 년 된 것 같다. 독립출판 강연과 서적은 쏟아지고,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도, 개인 유튜버들도 자꾸만 늘어난다. 미디어를 이용한 무한한 자기 표현의 시대임에 틀림없지만(요즘은 책도 SNS 마케팅을 포기하면 홍보가 어렵다), 그 왕성한 표현에 대한 응답은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끝날 '좋아요'와 '구독' 버튼 또는 짧게 흘리는 몇 줄의 댓글들 뿐이다. 대개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데, 과연 이 의미대로의 소통을 실현하고자 표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는 의문이다. 소통 빙자 표현 과잉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는' 그런 관계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연인이나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타인과의 관계에서 완벽히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의 반쪽이라 불리는 소울메이트라도 결국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는 서로의 반쪽일 뿐이지 같은 한쪽일 수는 없다. 이해받았다고, 또는 이해한다고 착각했다가 받는 상처의 크기는 가까운 관계일수록 깊고 오래간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지만, 반대로 끊임없이 오해와 이해를 반복하면서도 어떤 존재보다 관계에 집착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서 작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희귀하지만, 오해는 아주 쉽게 발생한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두 작가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거듭 반복되는 오해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명하고 그 희귀한 이해에 가 닿고자 노력한다. 이 모든 행위는 결국 관계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응급의학과 의사 겸 작가인 남궁인 선생과 꽤 성공한 연재노동자 이슬아 작가 사이에도 무한한 오해의 강이 흐른다. 이슬아 작가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성큼성큼 강의 중심부로 들어선다. 남궁인 선생은 이슬아 작가의 발걸음으로 밀려오는 물살에 몸을 낮춰 얼마 간 자신의 과거로 잠수하다가 슬슬 잠영하듯 헤엄쳐 나아간다. 둘은 강의 어느 지점에서는 극적으로 만났다가 다시 스쳐지나가 멀어지기를 반복하지만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성실함으로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 그리고 함께 더 큰 바다로 나아간다. 오해하고 해명하고 다시 이해하며 소통의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는 두 작가의 글을 보는 독자는 때로 긴장하고 때로  즐겁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똑똑한 두 사람의 교환일기를 엿보는 긴장감과 즐거움.


이슬아 작가의 편지 중에서 진한 밑줄을 그어 둔 문장을 옮겨본다.

선생님의 지난 편지에서 제가 보석처럼 여기는 문장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궁상을 떨었어도 작가님의 힘든 시절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것처럼, 작가님의 행복한 기억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쓰셨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 번 가까이 긴 편지를 주고받아도 선생님의 불행과 행복은 여전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사이엔 늘 오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테죠. 언젠가 선생님이 쓰셨듯 "우리는 대체로 패배하고 가끔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시 패배로 돌아올 것입니다." 서로를 모르니까요.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까요.(215쪽)


    이슬아 작가는 <깨끗한 존경>을 제외하고는 이전 글에서 주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으나, 이번 책에서는 우아한 질책과 함께 상대방을 꼭꼭 씹어 이해하겠다는 끈질긴 호기심으로 나이와 직업, 성별의 차이를 뛰어넘은 새로운 우정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남궁인 작가는 그녀의 질책에 자주 항복하는 듯하지만 변명과 자아 성찰과 다짐을 반복해가며 그녀의 편지보다 거의 항상 더 긴 편지로 최선을 다해 반응했다. 그가 한참 TMI와 자기 변명을 늘어놓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웬만한 공격에는 쓰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단단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계속 이슬아 작가의 펀치를 맞는 그가 그리 걱정스럽지는 않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 단단한 오뚝이같다.


     '죽음을 기록하는 작가'라고 알려진 남궁인 작가의 다른 책이 궁금해져서 <제법 안온한 날들> 또는 <만약은 없다> 둘 중 한 권을 추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응급실 의사로서 매일 마주하는 폭력적이고 절망적인 죽음,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분노, 삶의 허무함 같은 것들은 글로 쓰지 않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 그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매일 글쓰기를 할 수 있는지 놀랍다.



    사실 별책부록으로 자그맣게 만들어진 이 책은 배송받자마자 옆에 툭 던져놓고 본책을 다 읽을 때까지 열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본책을 다 읽고나서 두 작가의 대화를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아쉬움과 아련한 여운에 집어들었다가 말그대로 '동공지진'.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사이에 카톡과 메일로 주고받은 대화를 묶어놓은 건데, 최애 무비의 메이킹 필름 여러 편을 소장하게 된 감격을 선사했다. 카톡 대화를 읽다가 관련된 본책의 편지를 다시 찾아 읽기도 했다. 이 책을 본책과 함께 읽는 동안 이메일과 카톡의 시대에 편지로 주고 받는 소통은 얼마나 애틋하고 정성스러운 일인가에 대해 생각하데 된다. 이슬아 작가는 카톡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에겐 편지 자아랑 카톡 자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요. 카톡으로 먼저 회의한 뒤 시치미 떼고 편지를 쓰는 것 같아요."


    나는 '편지 자아'를 기억하는 30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교보문고 통로 사이에 끝없이 펼쳐진 카드 매대를 한 시간쯤 돌아다니다가 형형색색의 카드들을 봉지 한가득 사 들고 돌아오곤 했다. 카드 보낼 사람 명단을 만들어 밤새 비슷하면서도 다 다른 내용의 카드를 적어본 기억이 아련하다. 중학교 2학년 때 삐삐를 가진 친구를 처음 보았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종종 삐삐 번호에 언어유희같은 유치한 숫자놀이를 하면서 마음을 전하는 경우는 봤지만, 서로 시차를 두고 음성 메시지를 주고받는 건 고민해서 글로 마음을 남기는 것보다 금방 휘발될 뿐만 아니라 훨씬 오그라든다고 생각했다. 전화선을 뽑아 컴퓨터에 연결해놓고 하루종일 PC 통신을 하다가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두들겨 맞기도 해봤지만, PC 통신으로 하는 채팅은 '하이루', '방가방가'와 같은  이상한 유행어를 써가며 미지의 대상에게 '말조각'을 던지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운 문물에 대한 신비감 때문이었는지 PC 통신으로 만난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영화가 꽤 흥행한 적도 있었지만, PC 통신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선 인터넷이 등장하고 다시 제대로 된 '편지 자아'가 꿈틀댄 건 인터넷 상에 집 주소처럼 내 이메일 주소가 생기고, 벅스 뮤직에서 제공했던 BGM 깔린 이메일 기능을 알고나서였다. 편지를 쓰고 편지 내용과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하는 과정이 꽤 정성스러웠다. 그 벅스 이메일로 첫사랑에게 고백도 해봤지만, 그래도 연애가 시작되면 언제나 마음을 전하는 손편지였다. 카톡과 이메일이 일상이 된 지금도 연인들 사이에서는 손편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해 없이 상대방을 알고 싶은 순간, 나를 이해시키고 싶은 순간에는 '편지 자아'가 필요하다.


    편지 자아와 카톡 자아를 번갈아 볼 수 있도록 한 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아주 영리한 기획인 듯하다. 더 익숙한 건 카톡 자아지만, 카톡 자아는 본편이 아니라 번외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꽤 마음에 든다. 그들이 문을 연 서간문 에세이는 솜털처럼 가벼운 채팅을 소통이라고 착각하는 시대, 표현 과잉의 시대에 더 빛이 난다.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는' 진짜 소통의 경지에 이르면, 소통의 주체는 함께 성장하고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인식의 저변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동공지진의 소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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